“강도다! 강도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 포도청 관노인 덕보가 가장 먼저 살인하는 장면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덕보의 목청이 원체 커서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렸다. 대낮에 살인 사건이라니.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덕보의 소리가 계속되자 웅성거리면서 숲으로 달려갔다. 봉생도 포졸들을 따라 빠르게 숲으로 달려갔다. 숲에는 소복을 입은 여자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고 덕보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무를 하러 간 사람들을 뒤따라갔던 김애격도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변해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살인이다. 살인이야!” 덕보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눈이 휘둥그레져 악을 쓰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pp.10~11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하겠네. 오늘 좌포도청에 여인의 시체가 들어오지 않았나?” 김조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지휼을 쏘아보았다. “들어왔습니다.” 이지휼은 젊은 여자의 시체를 떠올리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내 며느리일세.”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지휼의 머릿속에 짙은 의혹이 일어났다. “위로 같은 것은 필요 없네. 내일부터 수사가 시작될 텐데 며느리가 강도에게 죽은 것으로 사건을 종료시켜주게.” 이지휼은 깜짝 놀라 김조일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은 살인 사건을 조작하라는 것이었다. 검험을 한 봉생은 고문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살인 사건을 조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리, 그것은…….” “내가 섭섭하지 않게 사례를 하겠네. 천 냥이면 되겠나?” 이지휼은 사내의 말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천 냥이라면 이지휼이 죽을 때까지 만지기 어려운 큰돈이었다. ---pp.53-54
이름이 봉생이라고 했다. 두 번째의 만남이었다. 장통방에서 정체모를 장정들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 그녀와 함께 냇가의 풀숲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장정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때 그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뭉클 한 가슴이었다. ‘아!’ 이연은 여자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자 아늑하고 포근했다. 그의 코끝에 여자의 육향이 풍겼다. ‘아, 좋다.’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뇌까렸다.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고운 턱에 봉긋한 입술이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어린 동생을 보호하기나 하듯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양제로 삼아야 하겠다.’ 이연은 봉생의 품에 안겨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를 두 번씩 만난 것도 인연인가.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 동궁전으로 불렀다. ---pp.109
김애격은 덕보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종사관 최귀열이 그를 부르는 이유가 해괴했다. 내가 이지휼을 살해했다고?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지휼의 아비가 망령이라도 들었다는 말인가. 그러잖아도 이지휼을 비롯하여 그들 집안을 좋지 않게 생각하던 김애격은 황당했다. “나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네. 이지휼이 죽은 것을 보았는가?” “아니요.” 덕보가 고개를 흔들었다. 김애격은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지휼이 무단결근을 하니 심보가 사나워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왜 멀쩡한 나를 끌고 들어가는 것인가?” “소인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종사관이 왜 나를 부르는 것인가?” “확인하려는 것이겠지요.”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무슨 확인을 해?” “이 포교님이 어디선가 나타나겠지요. 김 포교님이 동서지간을 살해할 리가 없지요. 그리고 시체도 없는데 무슨 살인 사건입니까?”
봉생은 포청의 다모이다. 수려한 미모와 뛰어난 검술뿐만 아니라 타고난 직관과 명민함으로 종사관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해결하며 포청에서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김애격은 봉생의 남편으로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지만 서자 출신으로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역관이 되었으나 모함을 당해 그 직위마저도 박탈당하고 포졸로서 살고 있다. 둘은 불우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살인 사건을 조작해주는 댓가로 거액의 돈을 주겠다는 양반의 제안을 거절한 애격은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쓴 채 옥에 갇히고, 우연한 연으로 세자의 밀명을 받아 먼 길을 떠난 봉생이 돌아왔을 때,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애격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