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말이야, 상상 속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이란 존재하지 않아. 정말 멋지지 않나? 이 지루하고 무능력하고 권태로운 인생 너머에 모든 악과 욕망으로 들끓는 또 다른 판타스틱한 세계가 존재한다면 말이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집중해서 잘 들어봐. 어쩌면 말이지, 진짜 인간들의 세계는 여기가 아니라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살면서 말이야, 그런 생각 안 해봤나? 이 재미없기 짝이 없는 현실 세계가 정말 진짜일까 하는 의심 말이야. 뭐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답답하고 무료하고 숨 막히는 현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느냐고. 어쩌면 현실은 말이지, 살아 꿈틀대는 저 멋진 무한 상상의 세계를 감추려고 위장한 심심하고 단순한 시뮬레이션 게임은 아닐까---pp.68~69
자, 어느 평온한 날 당신의 아침 식탁을 떠올려보자고. 실내에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가장조」 같은 우아하고 발랄한 클래식이 울려 퍼지는 게 좋겠군. 당신은 상쾌하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는 거지. 여느 날처럼 콘플레이크에 우유를 부은 접시를 끌어당겼어. 그때 당신 동공이 접시 속 한곳에 멈췄지. 그 안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발견한 거야. 두려워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봐.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게 개구리라면 좋겠나? 아니면 작은 태아가 좋을까? 당신이 만약 누군가에게 장난을 친다면 어느 게 더 끔찍할 거라고 생각하나? 하하, 이제 눈치를 챘나. 그래, 그러니까 이제 화장실로 달려갈 거 같은 그 구겨진 얼굴 좀 펴라고. 불에 탄 그것의 실체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고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겠나. 이제부터 중요한 건 상상이라고. 고가 우유 속에서 발견한 게 개구리라고 믿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실제 태아를 가스레인지에 태워버렸다고 해도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지.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야. 불에 타버린 건 시커먼 개구리의 재였을 뿐인데 가스레인지에 태운 게 태아라고 믿어버린 순간, 거기서부터 새로운 상상과 끝도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지. 당신도 한번 상상해보지. 이미 상상하기 시작했나? 어느 게 더 생생하고 현실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지? 개구리였나? 아니면 태아였나……---pp.82~83
네가 게임 회사에서 쫓겨난 후 너는 아내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녀가 점점 말을 잃어가고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어. 너는 그날 밤 아내가 여행 가방을 끌고 나가는 것을 알고도 잠든 척 일어나지 않았어. 너는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믿어버렸어. 아내가 일주일째 돌아오지 않자 너는 집 안의 모든 가구를 처분했어. 경찰에게서 아내와 아이의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을 때도 너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어. 아내와 아이의 장례식 내내 너는 한 번도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울지 않았어. 너는 보름 만에 다시 돌아온 텅 빈 집을 보며 아내와 아이가 감쪽같이 너를 버리고 사라졌다고 믿어버렸어. 이제 너에게 일어난 진짜 현실이 똑똑히 보이나. 네가 믿고 있는 현실은 진짜가 아니야. 네가 부정하고 지워버린 기억이 진짜 네 현실이야. 이제 진짜 고통을 느껴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아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끔찍한 고통을 가슴으로 절절하게 느껴보라고. 어때? 숨이 막히고 피가 거꾸로 돌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살아 있는 게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나……
극도로 예민하고 겁 많은 마태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배우 지망생 홍마리, 유명한 게임 개발자였으나 한순간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피시방을 전전하는 조. 이들은 상상하는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준다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레몽뚜 장’을 만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 모이게 된다. 그들은 레몽뚜 장을 따라 ‘더비 카운티 메디컬센터’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리’라는 여성을 직접 보게 된다. 레몽뚜 장은 마태수와 홍마리, 조에게 리의 영혼을 찾게 하고, 레몽뚜 장에 의해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모호한 시공간 속에서 리의 영혼을 찾는 세 사람은 괴기하고 섬뜩한 각자의 과거가 담긴 환상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지금까지 읽어본 적 없는 ‘치명적이고 눈부신 착란의 순간’. 김하서의 ??레몽뚜 장의 상상발전소??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다. 그것은 상상과 현실이 뒤섞이다가 급기야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불타오르는 순간이다. 작가는 바로 그 순간을 쭉 늘렸다가 팍 눌렀다가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그래서 몸통이 잘린 그곳에서 새로운 몸체가 뻗어 나오는 아메바처럼, 김하서의 ‘레몽뚜 장’은 끊임없이 이야기-몸을 자르고 바꾸고 분열시키고 증식하다가 급기야 이야기 세포들을 터뜨리고야 만다. 놀랍게도 이것은 상상력의 모터이자 이야기 자체다. 심진경 (문학평론가)
김하서의 첫 장편 『레몽뚜 장의 상상발전소』는 간만에 만나는 매혹적인 소설이다. 상상하고 욕망한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럴까. 김하서의 소설은 당신의 욕망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당신의 상상에 메스를 댄다. 여유롭고 냉정하며 정확하다. 롤러코스터 속도의 스토리텔링, 상상의 크레바스를 넘나드는 말들의 모험과 반전, 현대인의 비루한 욕망에 대한 서늘한 블랙 유머가 당신을 찾아간다. 그리고『레몽뚜 장의 상상발전소』와 더불어 한국문학은 우리의 내밀한 상상과 욕망에 대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상상력의 승리다. 복도훈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