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모스크바 대학 역사철학부를 졸업하고, 1872년 「사료(史料)로서의 고대 루시의 성자전」으로 석사학위를, 1882년에는 역시 같은 대학에서 「고대 루시의 보야린 두마」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867년에 알렉산드로프 군사학교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한 뒤, 1879년 스승인 솔로비요프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학교 러시아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면밀한 사료 분석 능력뿐만 아니라 탁월한 어휘 구사 능력을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마치 생생하게 눈으로 보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수강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사전에 준비된 강의안을 보지 않고도 강의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1889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준회원, 1900년에는 러시아 역사ㆍ문학학술원 정회원, 1908년부터는 미문학부분 명예 학술회원이 되었다. 수도원의 경제 활동, 러시아의 보야린과 농민의 역사 등 사회사를 세밀하게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체 역사의 큰 흐름을 정리했다. 그의 저서와 논문, 편짓글은 소련 말기에 『러시아사 강좌』(전9권)로 출간되었으며, 요즘도 러시아에서 가장 빈번하게 영인본이 나오고 있다.
클류쳅스키의 방대한 연구 가운데 특히 『러시아 신분사』는 그의 연구 경향을 잘 보여주는 명저로, 러시아 역사의 초기부터 18세기까지의 신분 성립과정과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클류쳅스키는 이 책을 통해 러시아의 신분적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신분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듯이 신분적인 차별이 소멸될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이런 탁월한 연구 활동을 인정받아 솔로비요프, 플라토노프와 함께 이른바 '러시아 역사학의 황금 시기'를 개척한 중심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러시아국립사범대학교에서 「1890년부터 1904년 7월까지 러시아에서의 자유주의 운동의 형성」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세대학교, 한동대학교에서 강사를 지냈으며, 지금은 경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있다. 역서로는 『유럽 근현대 지성사』(프랭클린 보머), 『역사관의 유형들』(데이빗 베빙턴)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1905년부터 1917년까지의 러시아 자유주의 연구」「20세기 러시아사에서의 국민 통합과 민족주의」「페테르부르그 역사학파의 성립과 발전」「스탈린 시대의 역사학」「『관념론의 문제들』의 출간과 그 의의」등이 있다.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국립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원에서 「스뻬란스키의 개혁: 이상과 실제」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한양대학교, 서강대학교, 숭실대학교 등에서 러시아 역사와 문화, 러시아 지역학 등을 강의했고, 지금은 강남대학교 교양학부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 아나키즘 100년』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러시아 봉건제에 대한 재해석」「이반 4세의 개혁: 연속성과 단절」「알렉산드르 1세 치세 초기 씨나트 개혁에 대한 재해석」「뻬스쩰의 개혁사상」「역사가로서의 뿌쉬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