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에서 문학창작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 계간 『문학나무』 여름호에 단편소설 「인간과 다른 인간」으로 등단했고 현재 경기대와 중앙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소설에 나타난 일상성』(2009), 『소설처럼 읽는 이야기 문학상식』(공저, 2006), 『한국단편소설 30선 특강』(공편저, 2007) 등이 있다.
신간은 쏟아지고 나 역시 그 마당에 한 권을 얹는다. 만일 그 행위에 의미가 있다면, 삶이 그러하듯 각각의 저작물 역시 시간의 퇴적물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과연 저마다의 책에는 저자가 살아온 혹은 살아낸 시간들이 집적되어 있다. 이번 나의 첫 창작집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이 쌓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다. 부끄러움과 게으름은 많이, 소설에 대한 열정은 아주 조금, 그마저도 아련히 묻어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가자, 또 가보자 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은 혹시라도 새롭게 더 쌓을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어쩌면 부질없을 수도 있는 바람 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인간-우락부락한 외모로 인해 오릴 적부터 별명이 ‘오랑우탄’인 남자 주인공은 어느 날 동물원을 찾았다가 철창 너머에 있는 실제 오랑우탄 수컷과 눈싸움을 벌이게 된다. 프로 복서 출신의 남동생이 조언해준 ‘눈싸움의 본질’을 떠올리며 그는 괜한 승부욕에 짐승과 맞서지만 결과는 그의 참패였다. 주인공은 학기가 끝날 때마다 수업시간 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 앞에 주눅이 들어 제대로 된 강의를 하지 못했다는 후회와 자괴감에 사로잡히는 대학 시간강사다. 그는 오랑우탄을 이기고 싶은 마음에 그때부터 매일 동물원을 찾기 시작하는데…….
지식인의 언어생활-정년퇴임을 불과 한 학기 남겨둔 민 교수는 학자이자 소설가로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소설가적 삶이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답답함에 남몰래 시달리고 있다. 여름방학 기간의 계절학기 강의로 개설된 〈지식인의 언어생활〉을 새롭게 맡으면서 민 교수는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생생한 인터넷 조어와 속어의 참다운 매력에 급격히 빠져들기 시작한다. 수십 년간 사용해온 학술적이고 문학적인 언어와 결별하려는 민 교수의 시도는 새로운 작품을 낳게 되는데 과연 그 작품의 정체는-
가장 높은 개-서른아홉의 대학 강사인 남자는 서른다섯 살의 백화점 판매원인 여자와 연애 중이지만 그 둘은 정서적으로는 전혀 교류하지 못한다. 책 속의 세상에 머무를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먹물 남성인 그와 “근사한 아파트 하나 분양받는 게 꿈”이라는 생활력 강한 그녀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 그녀의 육체를 잊을 수 없는 남자는 여자의 직장과 집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재결합을 호소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박해진 남자는 자신이 지닌 장점인 지성과 의지와 이성을 하나둘 내팽개치게 되는데…….
그 소리 쪽으로 한 발짝 더-1957년에 미국에서 생산된 고급 오디오 스피커 알텍 A-7이 화자로 등장한다. 수십 년의 시간 동안 두 자리 숫자가 넘는 오디오 애호가들의 손을 거쳐간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광기와 편집증에 사로잡힌 ‘최고의 오디오 마니아’의 집이었다. 알텍 A-7의 오랜 꿈은 자연의 소리와 자신의 소리가 한데 섞이는 경험이다. ‘우주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다. 깊은 밤, 알텍 A-7은 육중한 몸을 일으켜 미세한 물소리를 향해, 열망하는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대 안의 틈-오랜 경력의 화물차 운전수인 ‘나’는 지난해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몸 여기저기에 깊은 흉터를 지니게 된다. 사고의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전방의 균열’이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심야의 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사고 당시에 목격했던 불가사의한 ‘틈’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 물품 인수자를 만나기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려고 들른 공중목욕탕에서 ‘나’는 다시 그때의 생경한 ‘틈’에 대한 망상에 빠져버리는데…….
늙은 왕-책과 학문에 대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갈증을 지닌 ‘늙은 왕’의 영혼이 주인공 ‘나’의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그날 이후 주인공 ‘나’는 가족과 결별하고 세속과 자신을 격리시킨 채 시간의 흐름도 잊고 공부방에 틀어박혀 인류의 지식문명과 대결을 시작한다. 자신의 곁에는 ‘늙은 왕’뿐이다. 현실과 담을 쌓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선택한 어떤 삶에 대한 이야기.
밤길 저 너머-어느 날 대학 시절 은사의 자살 미수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동기들과 함께 은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문병을 간다. 태산처럼 거대했던 은사의 형용할 수 없는 쇠락한 모습 앞에 ‘나’와 동기들은 할 말을 잃는다.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에는 재즈 밴드를 만들어 음악과 연주에 미쳐 있던 그들이었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 중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음악을 그만두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청춘이 끝났다는 인식 앞에 ‘나’는 불현듯 뇌경색으로 수년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친아버지의 존재를 떠올리고 몸서리친다. 그리고 자살 시도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던 은사는 퇴원 후 갑자기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하는데…….
지식인이 누릴 수 있는 상징자본은 급락한 데 비해, 많은 지식인이 처한 경제적 조건은 여전히 또는 더욱더 곤궁하거나 불안하다. 위엄과 권위, 윤리와 의무 등의 무겁고 진지한 함의를 거느리는 지식인보다는 ‘지식 노동자’ 혹은 ‘지식 소매상’이라는 말이 오히려 귀에 익은 시대가 온 것이다. 요컨대, 지금, 지식인들은 자유와 위기 앞에 내던져져 있다. 김병덕의 소설들은 그런 의미에서 드물고 값지다. 그의 소설들은 종래의 지식인 소설, 그러니까 지식인 주인공이 사회와 자신 모두에 대한 지성적인 성찰을 수행하는 소설들과는 사뭇 다르다. 지식인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20세기적인 의미의 참여적 지식인이 아니다. 그들은 위신과 명예를 앞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왜소해진 지식인의 존재론적인 위기에 대한 징후가 된다. 김병덕의 소설은 다양한 사회적 인물군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지식인의 위기에 집중함으로써 이 시대의 전체적인 풍경의 한 급소를 포착해내고 있다. 노대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