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松江)의 〈관동별곡〉과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은 우리 동방의 〈이소(離騷)〉이다.그러나 그것을 중국 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악사(樂士)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거나 한글로 기록되어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관동별곡〉을 칠언시(七言詩)로 번역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인도 승려 구마라습은 “인도에서는 대개 말로 꾸미는 것(辭華)을 대단히 숭상하여,부처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인도의 노래는 무척 아름답다.그런데 그것을 중국 글로 번역하게 되면 다만 그 뜻만 알게 할 뿐이지 그 사화(辭華)는 전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사람의 마음이 입을 통해 나타난 것이 말이고,말에다 운율을 가미한 것이 노래요,시요,문장이다.사람의 언어가 비록 같지 않으나,말을 잘하는 사람이 자기네 고유 언어를 가지고 운을 잘 맞추기만 한다면,충분히 천지 를 움직이고 귀신에게까지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이는 비단 중국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한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빌려다 쓰니,설사 아주 비슷하게 표현한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나무하는 아이들이며 물긷는 아낙네들이 지껄이고 서로 화창(和唱)하는 것이 비속하다고는 하지만,그 참된 가치를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한시(漢詩)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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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 순천부의 명 가문에 한림 학사 유연수와 아내 사정옥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10년이 지났어도 둘 사이에는 가문의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씨는 어느 날 남편에게 첩을 맞아들일 것을 간청한다. 유한림이 '어찌 일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여 첩을 얻겠소. 첩이 들어오면 집안이 어지러워지는 법인데, 부인은 왜 화를 자청하시오? 천부당만부당하니 그런 생각 마시오.'
라고 반대하지만 사씨는 끝내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교채란이 첩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제 스스로 늘 말하기를,
'가난한 집 선비의 아내가 되느니보다는 공후 부귀가의 첩이 되는 것이 좋다.'
고 말해온 여인이다. 이때 교씨의 나이는 이팔청춘이었으나 성품이 교활하여 유한림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고 사씨를 섬기는 것도 극진해 보였다. 유씨 가문엔 전에 없던 기쁨과 화기가 떠도는 듯하였다. 사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유한림도 이제 자식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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