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하나님에 관해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우월감과 안정감을 느껴왔다. 신학적 논쟁이라면 누구와도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다. 신학 석사 학위를 딴 순간, 하나님에 관한 나의 이론은 ‘완성’되었다. 그때부터 누구라도 내 의견에 토를 달면 철없는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빠가 너희 아빠보다 더 세!”
나는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우리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보다 더 세! 내 믿음체계가 네 믿음체계보다 우월해. 내 책이 네 책보다 나아. 내가 승자고 너는 패자야. 그러니까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해 줄게.”
하지만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1장 우리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보다 더 세! 중에서
방법적인 측면과 상관없이 교회의 핵심은 관계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내가 볼 때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여러 모양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누구와도 함께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교회는 무한히 많은 만남과 어울림으로 이루어지며, 대개는 세상의 이목을 끌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런 작고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다.
서둘러 교회에 가려고 그냥 지나쳐 갈 때는 이 거리에 상한 마음과 물질적 어려움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하나님은 남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가운데 교회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무한히 주신다.
때로 우리는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가곤 한다. 예전에 교회에서 전도를 다녔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몇 개로 팀을 나눠 다른 동네로 전도를 떠났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집 문을 두드리는데 퍼뜩 회의가 일었다.
‘우리 동네에는 다른 동네 교회에서 전도를 오고, 우리는 다른 동네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구나.’
그냥 내가 사는 동네의 이웃집 문을 두드리고 서로 친구가 되어주는 건 어떨까? 매일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 돌봐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 3장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중에서
모든 상처받은 이들이여, 힘내게.
아직도 어릴 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여, 힘내게.
거부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여, 힘내게.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이여, 힘내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돌아버릴 것만 같은 이들이여, 힘내게.
우울증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힘내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이들이여, 힘내게.
아무도 모르게 신음하는 이들이여, 힘내게.
모든 상처받은 이들이여, 힘내게.
이 글이 실린 후 댓글이 빗발쳤다. 대개는 스스로를 상처받은 이들로 여기는 교회 출석자들의 댓글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뭐가 문제일까? 왜 상처받고 외롭고 우울하고 지친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영적 쉼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
크리스천들이 위안과 평안을 얻는 방법은 주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사실, 나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암송할 만한 성경 구절을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쩌는가? 성경 구절이 그저 종이 위의 공허한 글자로만 느껴지는 사람은 어쩌는가? --- 4장 모든 상처받은 이들이여, 힘내게 중에서
어리석게 사탄과 싸우려고 하면 내 안의 망상과 거짓말을 보지 못한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안의 참 자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물론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자신을 바꾸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사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오랫동안 힘겹게 씨름해 왔다. 사탄이 육체적 형태를 지닌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거짓 믿음으로 우리를 옭아매고 통제하는 체제 혹은 에너지인가? 사탄을 직접 만난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후자가 아닌가 싶다. --- 6장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은 마귀 중에서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모든 일에서는 사랑을.”
어거스틴이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얼핏 봐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서는 의견 차이를 딛고 힘을 합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종교의 틀에 얽매인 사람들은 이 격언의 첫 번째 부분인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만을 따진다. 그들은 일치를 빌미로 자신의 교리를 강요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거부한다. 지난 몇 년 사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나쟀 ‘본질적인 것들’이 바뀌었다. 특히 내게는 하나님에 관한 신학 교리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본질적이다. --- 7장 종교에 얽매여 세상에 아무런 유익도 못 끼치고 있지는 않은가 중에서
수도원에 갔다가 사진을 좋아하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제 카메라 렌즈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요.”
그녀는 카메라의 렌즈를 돌릴 때마다 “그분과 더 깊이 친밀해진다.”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진을 향한 그녀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저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정말 좋아하는 일, 열정을 느끼는 일,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일을 통해서 그분을 알기를 바라신다. --- 8장 인생에 목적이 꼭 필요할까 중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남들, 이를테면 존경하는 리더나 선생, 강사, 저자에게 의존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역할은 ‘양치기 개’로 보는 게 옳다. 양치기 개의 역할은 양들(사람들)을 목자(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도 이 책이 양치기 개 역할까지만 하길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께 끌리거나 하나님의 현실과 연결되거나 하나님을 찾기를 바란다. 그 후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몫이다.
성경 지식이 많은 크리스천 숫자와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며 사는 크리스천 숫자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이유가 뭘까? 정말, 왜 그럴까?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진리를 확증해 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남들의 의견에만 의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지식과 앎의 차이가 아닐까? 지식은 남들의 가르침을 받아 쌓는 것이다. --- 10장 목사보다 당신이 진리에 대해 더 잘 안다 중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주변 세상도 달리 보인다. 오랫동안 내게 기독교는 현재의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님과 천국이 저 위에 있고 나도 언젠가 그곳에 가리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때까지 내 목표는 하나님을 이 불경한 세상 속으로 최대한 짜내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딸을 쇼핑몰로 데려가 혼자 놔두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버리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하나님은 거기까지였다.
언제나 관점이 열쇠다. 거대한 물체는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알아볼 수 없다. 우주로 나가면 지구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겠지만 지구 위에서 걷는 우리에게 지구는 너무도 거대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히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우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일부를 놓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을 ‘아는’ 것과 같다. 바람은, 볼 수는 없으나 얼굴로 느낄 수 있다. 창문과 문을 활짝 열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임재와 음성, 사랑, 평안,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12장 과학, 하나님을 발견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