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만났느냐고? 시체들을 만났지. 나와 함께 그 시체들을 만든 사람들을 만났지. 달을 만났지. 그리고 달의 여신을 만났지. 그녀와 잤어. --- p.87
“진짜 지구가 멸망할까요?” “언젠가는 멸망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구 멸망이 따로 있냐? 내가 죽으면 지구가 멸망하는 거야.”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 할머니가 라디오를 똑 꺼버렸다. 할머니가 말했다. “세상이 망하든 흥하든 그게 뭔 소용이여. 얼어 죽을. 내 가게만 안 망하면 되는 것이제!” --- p.96
“이 세상엔 커다란 성이 있어. 성 안의 세상과 밖의 세상으로 나눠지지. 성 안은 풍요롭다 못해 삶이 무료하다는 얘기까지 나돌아. 성 밖에 버려진 자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쁘게 살아가지. 성벽은 까마득히 높아. 성 밖의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에 들어가기 힘들어. 넌 그 절망감을 몰라. 지금 넌 내 곁에 있지만.” --- p.128
그대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대가 깔본 모든 것. 그대와 싸운 모든 사람들. 현재 있는 모든 것. 사라진 모든 것. 다가올 모든 것.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지만 태양은 달에 의해 가려진다. --- p.146
“사람을 죽일 때 말이야, 가장 흥분될 때가 언제지 알아? 죽이기 직전의 긴장감도 괜찮지. 수십 대의 첼로가 한꺼번에 저음을 연주한다고 상상해봐. 그런 소리가 들려. 그리고 희생자가 죽음의 공포를 직감하는 절망적인 순간도 짜릿하지.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바이올린이 한꺼번에 강렬한 스타카토를 연주해. 살인의 과정은 어떤 예술도 재현할 수 없는 격정의 도가니지. 바이올린, 트럼펫, 티파니, 심벌즈, 모든 악기가 자기 파트를 충만하게 연주하면서 흥분에 가득 찬 클라이맥스가 폭발해. 살아 있는 근육이 칼날을 잡고 들어가는 느낌, 사방으로 튀는 피, 단말마의 비명!” --- p.179
달려!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만월의 빛이 어둠에 잠긴 세상에 출렁거린다. 배가 터진 순대가 뛰어다닌다. 시체들이 춤을 춘다. 삶을 포기한 아빠, 모범 시민상을 받은 버스 기사, 똘똘한 여대생, 하느님의 충실한 종 최 주임, 불안한 아줌마, 긴 생머리의 미나, 그리고 묘지에서 일어난 좀비들이 춤을 춘다. 환상적인 축제다. 달빛은 격랑처럼 출렁인다. 피의 아치가 떠오른다. 그 위로 푸른 폭죽이 터진다. 대지에 불이 붙는다. 비가 내린다. 바퀴벌레 떼가 날아다닌다. 나무들이 울부짖고 반짝이지 않는 금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