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은 재능 발굴부터 트레이닝 및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고 있는 전 세계 유일한 회사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지」가 보도한 내용이다. SM은 철저히 분업화된 ‘내부 크리에이팅 시스템’을 통해 ‘최강의 아이돌 제국’을 만들었다. 내부 크리에이팅 시스템은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로 구성돼 있다. 캐스팅팀은 정기적으로 오디션을 가진다. 인터넷을 통한 오디션도 열고 중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도 인재를 영입한다. 선발과정에서 도전자들의 인성, 가능성, 스타성, 실력, 잠재력도 고루 살핀다.
트레이닝 중인 수십 명의 준비생 가운데 상당수는 외국인이다. 슈퍼주니어M은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구성해 최초로 중국 본토를 주 무대로 활동한 그룹이다. M은 만다린이란 뜻. 이 그룹에는 한국인 멤버뿐 아니라 중국인 조미와 캐나다에서 자란 중국인 헨리가 포함돼 있다. f(x)의 빅토리아, 엑소의 레이, 타오 등도 중국인이다.
트레이닝팀은 안무, 보컬, 연기, 언어 등 네 가지를 중심으로 교습한다. 획일화된 교육보다는 ‘맨투맨’ 형식으로 맞춤형 트레이닝을 지향한다.
-29쪽
그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모험적인 방법들을 선택했다. 보아에게는 일찌감치 일본어를 가르쳐 데뷔 당신 일본인들이 자국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보아의 노래와 춤 등 제작 부분은 SM이 맡고 유통과 마케팅은 일본의 대형 업체 에이벡스가 맡았다. 이런 사업 방식은 K팝 업체 대부분이 벤치마킹했다.
그는 양측의 강점을 살린 현지화 전략으로 ‘윈윈’하는 방법을 추구해왔다. 물론 해외 진출의 선결 조건은 창조적인 콘텐츠 제작이란 사실도 누누이 강조한다. 그는 직원들에게 “지금은 문화의 시대, 콘텐츠의 시대를 넘어 ‘콘텐츠 프로듀싱의 시대’”라며 “창조적인 조직과 교육을 통해 창조적인 인물을 길로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원들이 각 파트에서 창의성을 강화하라는 주문이다.
-38쪽
YG의 핵심 경영 철학은 ‘패밀리즘Familism’이다. 소속 아티스트 간에 깊은 음악적 유대와 자체 깊은 음악적 유대와 자체 제작 시스템을 통해 더 놓은 수준의 콘텐츠를 생산한다. 양헌석 대표 프로듀서는 YG 가족의 맏형 노릇을 한다.
“제가 잘하는 건 사람의 장단점을 알아내 능력을 극대화하도록 해주는 겁니다. 제가 아티스트를 뛰어넘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의 약점을 감싸 안고 장점을 더 멋지게 보이도록 합니다. 그게 매니지먼트입니다.”
그는 시련을 겪고 이겨낸 가수들이 음악에서 큰 성과를 낸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도록 이끌려고 하지, 실수한 사람의 장점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소속사와 구성원 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가수 출신이란 점을 십분 활용해 해결한다.
-57쪽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문 양근환 사장은 김수현을 영입한 일등공신이다.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주인공 고수의 아역으로 출연한 김수현을 눈여겨봤다. 양 사장은 이듬해인 2010년 1월 1일자로 김수현과 소속 계약을 맺었다.
양 사장은 “김수현은 눈빛이 깊고 목소리가 매력적이라 어려 보여도 남자 느낌이 물씬 났다”고 회상했다.
김수현은 또래 배우들과 비교해 연기와 일에 대한 몰입도가 뛰어났다. 가령 「드림하이」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금세 배워 능숙하게 구사했다. 김수현은 연기적인 재능도 뛰어나지만 자신만의 아우라가 있다. 때문에 아티스트적인 이미지를 잘 부여해준다면 톱스타가 될 것으로 봤다고 한다. 모든 작품은 김수현이 최종 선택했을 만큼 안목 또한 높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캐릭터와 상황, 흥행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80~81쪽
신 대표의 유일한 취미는 음악감상이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라디오에서 음악을 즐겨 들었다. 대학 시절에는 음악과 나이트클럽 등에 빠져 사느라 학사경고를 두 번 받았다. 그 경험이 나중에 사업에 커다란 자산이 됐다. “놀아본 자들이 사업을 잘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직장에서 퇴근한 후에도 매일 한 시간씩 음악을 감상했다. 2,000여 장의 CD도 모았다.
SK텔레콤 근무 시절 회사 내 동호회 게시판에 오디오 관련 글을 자주 게재했는데 그 글을 접한 임원이 적임자로 판단해 음악사업팀장으로 발탁했다. 그는 2007년 SK 계열사인 서울음반 대표로 취임해 이듬해 로엔엔터테인먼트 사명을 변경하고 멜론을 합병했다. 2009년 스마트폰에서 처음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선보였다.
신 대표는 한마디로 음악 콘텐츠 분야에서 ‘통섭형 인간’이다. SK텔레콤에서 이동통신마케팅을 한 경험에다 음악 콘텐츠의 속성까지 양쪽 모두 훤히 꿰뚫고 있다. 음악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전 분야에서 기술과 테크놀러지에 대한 식견과 경험을 두루 갖춘, 드문 경영자이다.
-106~107쪽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라.”
심 대표가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성공은 성실하고 꾸준히 삶의 단계를 밟아오면서 만들어진 현재의 순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자신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어 야망이나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했고, 그랬는데도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아쉽지만 깨끗이 승복하는 타입이라고 했다.
누군가 “당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열등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는 필요 이상의 열등감 속에서 청춘을 낭비하고 소비했던 시절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하고 싶었던 일을 잊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이 되겠다.” 같은 결과물보다는 꿈에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결과가 어떻든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치열하고 충실하게 나의 삶을 스스로 엮어 나갔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그 과정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자부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147쪽
그는 돈 없이 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하루에 10신씩 120신을 쓰면 두 시간짜리 한 편이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신혼여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는데 신랑이 살해되고 범인은 신혼여행객 중에 있다.’는 한 줄짜리 아이디어를 120신으로 풀어냈다. 얼마 전 다녀온 신혼여행 경험에다 당시 읽고 있던 법의학책 지식을 녹여냈다.
그후 그는 곧 업무에 복귀했다. 1년 뒤 태창흥업이 3,000만 원을 걸고 시나리오를 공모한다는 기사를 접한 뒤 노트북에 있던 그 시나리오를 꺼내 접수했다. 한 달 뒤 ‘당선’ 통지를 받았다. 회사에서도 카피라이터로 발령났다. 그 무렵 그의 꿈은 독립 광고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벤처 열풍이 불면서 대거 이직행렬이 일어났다. 윤제균 대리도 이때 벤처기업 심마니로 옮겨 ‘네티즌펀드’를 운영했다. 전략기획팀 근무 시절 특허출원을 받은 사업 모델로 네티즌들로부터 소액 공모를 받아 영화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업무와 관련해 영화계 인사들과 자주 만나다 한 영화사 대표로부터 시나리오 제안을 받았다. 이때 조폭이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두사부일체」를 건넸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를 구하지 못해 프로젝트가 표류했다.
그때 윤제균은 “제가 감독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서른세 살인데 한번 실패한다 해도 내 인생의 기회가 한 번은 더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광고회사에 근무한 경력을 밑천 삼아 기획서를 잘 만들어줬다. 2001년 3월 윤 대리는 마침내 윤 감독으로 인생항로를 갈아탔다.
-209~211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