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1조가 된 미치요도 반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치요가 자리에 앉자 일단 항상 미치요를 졸졸 따라다니는 두 사람이 다가왔다. 둘 다 미치요와 같은 필통, 색연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다가온 아키가 같은 조로 자신을 초대한 미치요에게 “고마워”라고 인사를 했다. 다른 조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힐끔거리며 이쪽을 본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반에서 가장 예쁜 오노우에 아키 옆에 반에서 가장 못생긴 아키모토 무쓰미가 앉는다. 무쓰미가 어느 조에 들어갈까,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분명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까지 다들 어느 정도는 ‘같은 조가 되자’고 약속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무쓰미는 그런 약속을 할 친구가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미치요는 조 편성이 시작되자마자 반 아이들 앞에서 무쓰미에게 같은 조가 되자고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무쓰미가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때, 미치요는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p.53
한 사람이 일어나자 다른 아이들도 잇따라 일어났다. 순식간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던 아이들이 모두 슬리퍼를 타닥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부드러운 이불이 미치요의 발을 덮고 있다. 머리카락에서는 익숙한 샴푸 향기가 나고 있다. 두근두근. 혈관이 꿀럭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놓고 간 트럼프 카드가 방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미치요는 끌어안고 있던 카드를 후드드득 이불 위에 떨어뜨렸다. 그때마다 그곳에 그려져 있던 마크나 숫자가 하나씩 무효가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 안에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다. --- p.138
무쓰미는 더 빨리, 더 빨리 페달을 밟았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쓸데없는 생각만 맴도는 머리를 통째로 어딘가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체육시간에 2인 1조가 되어야 했을 때, 교실에서 음악실로 이동할 때, 소풍 때에 같이 다닐 조를 짤 때, 수영 수업을 잠시 쉴 때, 좁은 장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대체 누구 옆에 있어야 할지 몰랐을 때, 무쓰미는 혼자서 붕 떠서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고민해왔던 일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정말 달콤하고 상쾌한 발견이었다. 어깨에 멘 가방 안에 노란색 표지의 모눈 노트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쓰미는 슈스케의 기뻐하는 얼굴을 떠올렸다. 같이 연극부에 들어가면, 시즈카는 분명 기뻐해준다. 내가 더 예쁜 포스터를 그리면, 시즈카뿐만 아니라 연극부 사람들까지 기뻐해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되면 슈스케도 더더더 기뻐해준다. 수학여행 안내서 표지 그림을 보며 아키가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라고 말해주었을 때처럼…….
--- p.163
싹둑.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끝이 발가락의 피부를 자극했다. 아주 작은 그 자극으로 계속, 계속 숨겨두었던 또 하나의 마음이 드러났다. 수학여행 안내서의 표지를 그린 이유는 반장보다도 자신의 그림이 더 뛰어나다고 반 아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모눈 노트 표지에 그림을 그려준 이유는 나중에 남동생이 “친구들이 잘 그린다고 칭찬해줬어”라는 말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색지의 그림을 그린 이유는 3학년 선배에게 써줄 말이 없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미술 담당 일에 열중한 이유는 누구에게도 결코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 위치를 지키면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츠카사 님의 잡지를 몇 번이나 읽은 이유는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욕심을 투영하여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한 공연 포스터를 그린 이유는 연극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카마치 선배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다.
--- p.226~227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왜 아이들의 괴롭힘이나, 병을 극복한 과거가 없는 걸까. 나에게는 왜 어릴 때 멀리 떨어진 아빠가 없는 걸까. 나에게는 왜 설득력을 뛰어넘을 만큼의 스토리가 없는 걸까. 이러한 스토리를 쌓기도 전에 왜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 결까. 하지만 이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마도카의 작은 손 안에서 봉투가 구겨져 있었다. 만들어야 한
다. 자신도 무대에 서는 것을 정당화할 만한 이유를,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츠카사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기숙사 현관에서 얼굴을 내민 같은 방의 여자아이가 “얼른! 이제 곧 아홉 시야!”라고 소리쳤다. --- p.284~285
사라져가는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저주가 풀려간다. 츠카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히 나는 정말로 이 업계에서 은퇴하게 될 때에도 아마 특별한 이유가 없으리라. 스토리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다. 그 사람의 배경이나 여백, 스토리는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코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순간순간의 만남을 반복하다, 바로 뱉어내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순간순간 상상으로 떠올릴지도 모르는 스토리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 순간의 바로 자신, 그뿐이다.
--- p.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