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낯선 피를 가진 사람을 접하면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상대방이 완전히 꼬리를 내리지 않으면 내 영역을 침범하고 내 소유를 빼앗길까봐 과도하게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유전자에게 매혹되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공격성을 억누르고 피를 섞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에로티즘뿐이다. 하지만 에로티즘을 통해 피를 섞었다 해도 경계와 배척이 완전히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낯선 피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은 피에 새겨진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배신은 계속된다. ---작가의 말 중에서
마르셀은 몸을 곧게 세우고 그를 멀리 바라보면서 발을 내딛어 그것을 두세 개 밟았다. 물컹, 진흙과 밀랍이 함께 뭉그러지면서 발가락 사이로 쭉 밀려올라왔다. 보들보들하게 착 감겨드는 촉감이 그녀의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등뼈를 간지럽혔다. 뒤꿈치를 다시 내려놓을 때 물큰 앞으로 밀려나며 불룩 솟는 밀랍이 발의 아치를 살짝 찔렀다. 그것은 또 아주 가는 바늘을 그녀의 둥근 엉덩이 사이로 찔러 넣는 것 같았다. 나지막하게 내려앉은 어스름이 수많은 여자들의 성기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들은 바닥에서 얼마쯤 떠있는 것 같았다. 어떤 입술은 뾰족하게 내밀어져 있었고, 어떤 입술은 도톰한 볼에 숨어든 것처럼 보였다. 어떤 입술은 유난히 커다랗게 피어 있었고 어떤 입술은 꼭 다물려 있었으며, 어떤 입술은 금방이라도 바르르 떨릴 것처럼 살짝 벌려져 있었다. ---pp.15-16 - - - - - - - - - - - - - - - 그는 자기의 인생에서 마쓰코와 마르셀이라는 여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가정했던 적이 없었다. 정말, 우연히 그녀들이 그의 인생에 접속이 되었다. 그녀들 또한 우연이었겠지. 그의 우연과 그녀들의 우연이 만나 괴상한 운명이 되어버렸다. 그녀들을 처음 만난 그 순간, 그가 특별한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녀들의 운명과 그의 운명이 만나 파괴와 자멸로 치달은 것이다. 그녀들 역시 장만큼이나 뒤틀린 운명을 가진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p.250 - - - - - - - - - - - - - - - 장은 마르셀의 입술을 자세히 읽었다. 나를 바치고 싶어요. 윤기가 감돌고 촉촉하며 살아 꿈틀거리는 입술을 타고 그가 해독하기 어려운 문장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금방 사라져버릴 목소리. 그 목소리를 잡으려고 장의 눈은 그녀의 입술에 바짝 다가갔다. 나를 바치겠어요. 그 두 마디는 장의 뇌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목을 향해 뻗게 만들었다. 가는 목소리와 함께 가는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는 문득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초록색 홍채의 무수한 잔주름이 그를 향해 서서히 열렸다. 그 어둡고 깊은 곳에서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던 열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깊고 깊은 우물의 한가운데서 나를 바치겠어요, 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친다. 그것은 신성한 존재에 대한 숭배의 가장 높은 단계가 아니던가. 장에게는 내 목을 바치겠어요, 라고 들렸다.
방송국 PD 장, 프랑스인 마르셀, 일본인 마쓰코, 정신과 의사 정이라는 네 남녀의 섹슈얼한 관계를 파고드는 소설이다. 네 인물들의 성기의 모놀로그로 시작하여, 주인공들의 이름을 딴 각 장은 마르셀과 장이, 마쓰코와 장이, 닥터 정과 마르셀이, 닥터 정과 마쓰코가 맺는 소위 ‘비정상적’인 관계를 따라간다. 때는 각국 출신의 이주민들이 국내에 자리 잡기 시작한 현재.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장은 가학적 섹스밖에 알지 못한다. 마르셀과 마쓰코 두 여성은 모두 장과 위험한 관계를 가지다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목이 졸리곤 한다. 그들 각각은 정신과 의사 정의 상담을 받지만 닥터 정 역시 장과 같은 가학성을 겨우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희미하게 서로의 존재의 감지해온 두 여성은 후반부에 이르러 서로 만나고, 사적인 관계에 매몰되어 하마터면 질식할 뻔한 이들은 봄바람과 자리를 맞바꾼다.
두 명의 여자가 있고,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모두 자기만의 비밀과 부재, 그리고 결핍에 시달리는 인물들이다. 이 네 인물의 인생유전이 엮여 들어가는 비밀과 결핍의 빈 공간을 더듬어가는 방현희의 손길은 아주 매혹적이다. 섬세한 단비와도 같은 에로틱한 묘사와 끊임없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추리소설의 플롯을 갖춘 이야기는 부재의 관능적인 중심을 향해 나선형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넋을 잃은 춤사위처럼 황홀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결핍이 없으면 관능도 사랑도 없고, 이야기도 인생도 없다는 진실!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은 한국소설에서 그동안 결핍된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우리가 오래도록 앓고 있었던 불감증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우는 감각의 향연이다. 그러니 에로티시즘이 단 하나의 주제, 단 하나의 사건, 단 하나의 주인공인 여기, 이 소설을 보라! 복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