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나한테 늘 버거운 존재였다. 엄마의 입버릇 중 하나는 “넌 아직 덜 배웠어. 아직 멀었어”였다. 강한 부정 속에서 내가 마침내 도달한 답은 “그럼 어때?”였다. 미숙한 것을 인정해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그때부터 미숙한 것을 즐기기로 했다. 마치 덜 익은 사과는 풋사과 나름의 맛이 있는 것처럼 무리하게 익은 사과가 되는 일을 그만두었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 나이에 용서되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청춘은 아프다. 이리저리 채이고 재고 그리고 삼켜지지 않는 것들을 때때로 억지로 삼켜야 하기에 아프다.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 그 생채기를 덮으려 다시 생채기를 내기에 아프다. 하지만 정녕 그것은 아름답다. 미숙해도 되는, 미숙해서 아프고 미숙해서 아름다운 우리의 청춘. --- 「01. 정제되지 않는 정제될 수 없는 청춘」 중에서
대학은 20대에게 계급이나 마찬가지다. 지잡대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어서 편입학원이나 재수학원으로 이동하는 지방대생의 모습은 대학서열이 20대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대 사이에서 중앙과 지방의 권력관계는 교육여건의 문제로 인해 in서울과 지잡대로 구분된다. 이것은 학벌지상주의, 중앙중심주의의 사회가 만들어낸 모습이다. 그것이 20대 안에서 계급과 서열로 구분될 뿐이다. 그 때문에 꽃다운 열아홉 살 11월 단 하루 친 시험 때문에 괴로움에 치를 떠는 누군가가 자꾸만 생겨나는 게 문제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 「02. 20대는 대한민국의 지방이다」 중에서
20대 후반이 되면서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그녀들이 지독한 오춘기를 겪는 중임을 알게 된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내가 잘하는지 그런 것들을 고민할 새 없이 남들이 취직을 해야 한다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서 취직을 했고 취직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 일하다 불현듯 돌아보면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고백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역시 사춘기의 특징이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사색해야 할 시간에 세상의 룰이라는 굴레에 나를 맞추는 데 급급했기에 25살이 넘어서 때로는 30살이 되어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이대로 시간이 흘러도 되는지 고민한다. 그러다 막상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살아야 할 것 같고, 카드 명세서를 보면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나서기 두려워진다. 그냥저냥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고민한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사춘기적 고민을 안고 사춘기에나 겪었을 극심한 감정기복에 힘들어하면서 우리는 하루하루 살고 있다. 우리의 사춘기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 「11 나는 서른 살이 두렵다」 중에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마저 오늘날의 20대가 느끼는 불안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의 불안은 이보다 더 지독하다. 보통은 우리의 불안은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한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이라고 말한다. 아, 어찌되었건 이들에게는 어디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라도 있다. 예컨대 “나는 아직 가난하고 가진 게 없으니까 좀 더 벌고 노력해야 돼”라는 마음이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대는 그게 아니다. 소속될 곳이라도 있는지를,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 「12 너와 나를 사로잡는 우리의 고질병」 중에서
유동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것이 버려진다. 유행에 따라 버려지는 물건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문제는 버려지는 것이 물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도 버려진다. 그리고 버려진 인간들은 철저히 격리된다. 한번 쓸모없다고 판단되면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종국에는 돈 문제로 치닫게 된다. 쓸모없는 인간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결국 쓸모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업자, 망명자, 범죄자 등은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버려진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잉여가 되었다. 현대사회가 가진 유동성에 의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배제된 것이다. 물론 청년실업자는 희망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고, 배제된 것이 아니라 아직 분류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우리는 활용되고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죽기 살기로 노력하여 잉여에서 벗어났으나 3년 뒤, 5년 뒤 다시 잉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놓인 유동하는 공포다.
--- 「13 나는 잉여다. 너는 예비 잉여다」 중에서
당위성과 불편함, 저항과 냉소, 어디선가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은가? 당위성과 저항이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이라면 불편함과 냉소는 현 20대의 사고방식이다. 불편해서 움직이고 냉소적으로 대응한다. 어느 쪽이 더 다루기 어려울까? 소설의 후반, 고문을 당하던 줄리아는 윈스턴에 비해 빨리 죄를 뉘우치고 반정부적인 이념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미 적응을 배운 냉소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존재한다. 드러나는 분노와 드러나지 않는 냉소, 사회가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일까? 오늘날 기성세대들은 분노만을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저항은 냉소다. 드러내지 않는 냉소 그리고 참여하지 않음으로 인해 탈사회적으로 바뀌어가는 정체성, 오늘날 20대가 정녕 위태로운 것은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19 감시종결자」 중에서
유시민은 『후불제 민주주의』란 책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후불했다고 말했다. 87 민주화운동으로 이룩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조금씩 갚아나가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 완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바로 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20대 역시 훈련 중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걸까? 그들의 실천과 훈련이 기성세대의 실천이 아니고 훈련방식이 아니라고 하여 무개념, 무정치, 무능이라는 단어로 매도해버릴 수 있을까? 설령 그들이 비정치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전환될 수는 없는 걸까? 적어도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20대에게 잘하고 있다고, 변화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치 원죄를 가진 죄인처럼 취급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 「03 우리의 정치의식은 그대들의 자화상이다」 중에서
상품에서 주체로의 변화는 곧 객체에서 주체로의 변화다. 오늘날 20대에게 이런 변화는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선택되어야만 하는 상황, 선택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 속에서 20대는 기꺼이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보다 나은 상품이 되기 위한 포장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객체가 됨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소비를 통해서 푼다. 그러니 소비를 할 때만 존재감을 느낀다는 친구의 고백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더 이상 풍자가 아니라 현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된다.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 일을 하고 상품화된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시 소비로 풀고 다시 노동을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운 좋게 직장이라는 열차에 승차한 20대들이 매달 카드 값 때문에 다시 출근한다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실한 자기고백이다. --- 「07 욕망의 근원을 찾아서」 중에서
이미지의 문제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도 결국은 이미지와 인식의 문제다. 죽어가는 사람을 단지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있던 순간을 떠올리고, 피가 단순히 붉은 물질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 생동했던 존재의 몸속에 흐르는 것으로 확실히 인식한다면 그것은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다. 해답은 결국 우리의 통각을 타인에게도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아픔의 촉수가 나만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향하게 한다면, 그로 인해 연민하는 것을 넘어 공감하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때로는 행동하는 적극성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팠겠구나’ 생각해주는 것, 아니 누군가 고통을 표현할 때 한발 물러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다가가 생각하는 것, 손가락 한마디만큼만 열린 마음을 가지면 될 일이다. --- 「09 잃어버린 고통감수성」 중에서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정말 불편하겠어”라거나 “터무니없어”라고 느끼는 것에서 인권은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권의 이해도가 아니라 인권감수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공감보다는 판단이 앞선다. “동성애자는 이래서 안 돼” 또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이래서 안 돼” 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공감 이전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 「10 지금 필요한 인권감수성」 중에서
우리는 그 때문에 도망을 친다. 그것이 잉여질이건 판타지로의 도피이건 혹은 위저드 베이커리와 같이 현존하는 어떤 장소이건, 어차피 내가 책임지고 내가 맺었으면 내가 풀어야 할 것을 알지만 때로는 용기가 없어서 때로는 답이 없어서 때로는 지쳐서 도망을 친다. 그 기간 동안 유예를 버는 것이다.
유예는 휴식과 다르다. 휴식이 재충전이라면 유예는 그저 버려두는 기간이다. 버려두는 기간, 우리에게는 늘 그 기간이 필요하다. 세상은 우리를 조이고 도망치지 말 것을 주문하며 심지어 어른들에게는 인생의 유예기간이었다는 빛나는 20대의 청춘마저 침범하여 닦고 조이고 기름칠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니 우리는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잉여질은 유예놀이고 위저드 베이커리이다. 하지만 우리도 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임을……. --- 「20 오늘도 현실도피 중」 중에서
나도 모?게 진행되는 단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을 치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20대에게 울음은 허용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20대가 내뱉은 가벼운 말들은 언어학적으로 가볍되 실존적으로는 무겁다. 우리의 개그코드는 그래서 블랙코미디이며 자학개그이다. 멍청하게 가볍게 쿨한 것에 열광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 「21 삶은 울기엔 애매하다」 중에서
선택의 문제다. 형편상 잠자는 방, 옥탑, 고시원만 허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고시원을 선택한다. 그 순간 고시원은 계급문제이자 세대문제가 된다. 그렇다.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집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허용되지 않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집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택하지 않는 것과 처음부터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흔히 고시원은 화재와 가난 등과 직결되며 이주노동자의 주거지로 상징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시원의 진짜 이름은 20대다. --- 「백수, 청년에게 허용된 유일한 집」 중에서
동일한 프레임을 몸에 적용해놓고 스스로 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외부의 소리만으로 몸을 만들게 하는 요즘의 방식은 몸의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몸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킨다. 몸의 흐름, 몸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방식을 주입시키고 적응시키려는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 몸은 내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면 “내 몸에 손대지 마!”라는 외침도 인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 몸에 대해서 간섭하지 마!”라는 말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도움을 요청할 때 손을 내밀어주는 건 몰라도 내 몸을 쉽게 대상화시키고 유흥거리로 삼지는 마시라. 살이 쪘건 말랐건 그건 내 몸이다. 어차피 네 몸은 아니다. --- 「26 나는 뚱뚱하다. 그래서 어쩔래?」 중에서
놀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진지함보다 유희를 사랑하는 것 역시 인간이 가지는 특성 중 하나다. 게다가 전혀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놀 때 진짜 진지하다. 우리가 가지는 불규칙성, 파괴성 등도 사실은 놀이의 특징이며 젊음의 상징이다. 애당초 시위는 이러해야 하며 말은 이러해야 한다는 원칙이 어디에 있던가? 파괴하고 왜곡하고 그것을 즐기는 동안 세상은 변화하고 발전한다. 놀이를 우습게보지 마라. 그리고 놀이를 무시하지 마라. 여전히 진중하고 진지하지 못하다고 하여 20대를 어른아이처럼 보지 마라. 단지 우리는 좀 더 놀이를 사랑하는 유희적인 인간일 뿐이다. 놀이를 좋아하고 진실로 진중하지 못한 것이 20대의 특징이라면 -사실 오늘날 20대가 얼마나 잘 노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그것 또한 문명의 변화와 유전자적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 「28 노는 게 어때서? 나는 노는 게 제일 좋아」 중에서
이전에 80년대 학번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지식인이라는 대리인의 성격으로 참여했다면 우리의 운동은 이제 좀 더 현실적이고 개인적이다. 80년대 운동 구호는 군부타도이었겠지만 우리의 구호가 “등록금 깎아줘요”인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외칠 말도 달라졌다. 그리고 세상도 달라졌다. 즐겁게 신나게 재미있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러고 있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대기업이며 공무원 시험을 위해 땀 흘리는 아이들이 있지만 한쪽에서는 또 다른 삶을 준비하는 20대들이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즐겁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나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오늘날 20대가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야 할 일이지, 누구나 나서서 쭉 줄서서 짱돌을 던져대는 건 우리의 방법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바리케이드와 짱돌은 아름답지는 않잖아. --- 「29 짱돌도 예쁘고 귀여워야 취급한다」 중에서
어느 누가 그랬던가?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전자는 삶을 살지만 후자는 생존을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산다. 먹기 위해, 자기 위해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산다. 슬픈 생존의 굴레, 그것이 프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한 거다. 이쯤 되면 불만도 생기고 억울하기도 하다. 우리는 왜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아마추어의 삶을 살지 못한 채 프로가 되어야 하는가? 실컷 아마추어의 삶을 누리고 프로를 선택한 기성세대들도 버거워하는 이 프로의 세상에 우리는 헐벗겨진 채 던져진 것일까?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생각한다. 아마추어가 정말 나쁠까? 평범한 게 죄악인가?
--- 「30 아마추어는 늘 즐겁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