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찍이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뒤부터는, 상보다는 오히려 벌만 줄곧 받아온 사람이다. 오직 목숨을 걸고 시를 써 왔어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눈물과 상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버릴 생각을 한 적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나를 한사코 붙드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소월과 동주를 비롯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옛 시인들이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지난한 삶에 비한다면, 내가 겪는 아픔 따위는 한 낱의 엄살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래서 요즘 들어서 나는, 이 세상에 아직도 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거기에다가, 사람이 살다 보면 뜻밖에 좋은 일도 있는 것처럼, 근래에 갑자기 내 지난날의 감옥살이가 억울했다는 것이 법적으로 증명되기에 이르렀으니, 사람이 죽지 않고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이미 수십 년이 지나간 뒤이지만, 박정희 정권이 내 시 작품 ‘노예수첩’을 트집 잡아서 나를 ‘국가모독죄’로 걸어서 감옥에 오래 가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위헌 판결’이 2015년 11월 18일 헌법재판소 9명의 재판관 ‘전원 일치’로 내려진 것(사실 나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입건되었는데, ‘긴급조치 9호’에 대한 헌재의 위헌 판결은 그 이전인 2013년 3월 21일에 있었다)에 이어서, 지난해 1월 20일에 서울지방법원의 재심 법정에서 그 ‘노예수첩 사건’에 대해서 30년 만에 ‘무죄’의 선고가 내려졌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의 한이 눈곱만큼이라도 풀린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
그래서 요즘 나는 힘겹고 괴로운 지난날의 내 삶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파란만장이 나의 운명이라고 여기면서 그저 담담히 되돌아볼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골라서 여기에 조각보처럼 듬성듬성 이어서 썼다.
나를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자랑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성공담이나 자랑거리를 위주로 쓰는 글이 자서전이라고 한다면, 이 글은 자서전이 아니다. 다만 시대적인 격랑 속에서 ‘시詩’라는 돛대를 껴안고 험한 파도를 헤치며 살아온 상처 많고 굴곡진 내 젊은 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에필로그」중에서
지나간 시절의 발자국들은 모두가 그리움이 된다. 아무리 그것들이 온갖 풍상의 흔적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서 오래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바라보면 낱낱이 새롭고 애틋하다. 그리고 지난날을 생각하는 중에 무척 아프고 괴로웠던 대목에 이를 경우에는, 그 동안에 까마득히 잊고 살아왔던 전후의 사연들까지도 세세하고 또렷한 영상으로 눈앞에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대게 입을 모아서 자신의 생애를 두고 책으로 쓴다면 여러 권이 될 것이라고들 말하는지 모른다.
나의 삶도 역시 열에서 아홉은 돌 자갈 가시밭길이었다. 더욱이 세상을 바꾸는 싸움의 전사를 자처하며 좌충우돌 떠돌던 젊은 날에는, 그 하루하루가 마치 까마득히 높은 벼랑 위를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길고 외로운 싸움 끝에 줄곧 상처 입고 길에 쓰러지고 수렁에 빠지기를 거듭하였으니, 인생이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의 눈에는, 내가 사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그런 삶의 과정이 나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래 위의 발자국들을 물결이 한 순간에 지우듯이 깨끗이 지워 버릴 수만은 없을 것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런 까닭으로 나는 오랫동안 주저해 오다가 어느 날 문득 용기를 내서 내 삶의 격랑기激浪期에 대한 글을 써 보기로 작정했다. 그러면서 나는 오직 한 가지, 세상의 모든 삶 중에 이런 종류의 우여곡절을 겪어 온 삶도 있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내가 무슨 책에서 읽었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는 문장이 떠올라서, 감히 이것을 빌려 이 책의 표제로 삼았음을 고백한다.
---「글을 마치고 나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