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개정신판!
깔끔한 체제와 컬러 도판, 새로운 글들을 보완한 新고전
서울시 성북구 성북 2동 126-20번지 한갓진 골목에 자리 잡은 ‘최순우 옛집’에는 요즈음 하루 500여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는다. 혜원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미인도>를 내놓은 간송미술관의 전시에 인파가 몰리고,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시민문화유산 1호’로 보존된 이곳을 들르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들은 방문객들에게 단아하고 정갈한 사랑방을 가리키며 최순우 선생의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집필된 곳이라고 설명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최순우 선생의 전집에서 주옥같은 글을 추려내 엮은 단행본이다. 회화, 도자, 조각, 건축 등 한국 미술의 전 영역에 걸쳐 작품의 면면을 더듬고,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을 그린 120여 편의 글이 꾸준히 눈 밝은 독자를 찾아갔다. 이 책은 1994년 초판 출간 이래 50만 부가 나갔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많은 독자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유물을 생생한 컬러 도판으로 감상하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책의 체제를 새롭게 바꾸는 일은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옛 도판들의 컬러판을 일일이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선생의 전집에서 새 글을 가려 뽑는 일에도 진지한 숙고가 필요했다. 새로운 개정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활자를 키우고 목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으며, 시원하고 깔끔한 편집으로 가독성을 높여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배려했다.
2 총 130여 개 흑백 도판을 컬러 도판으로 바꾸었다.(몇 개의 도판은 개인소장품으로 컬러도판을 찾을 수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석굴암과 불국사, 부석사 등 우리나라의 주요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찍어온 사진작가 안장헌의 사진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십일면관음, 부석사의 무량수전 등을 보다 생생한 컬러로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의 회화 작품과 오묘한 청자의 비색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도판을 실어 최순우 선생의 해설을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3 회화 부문에서 구판에 빠져 있던 조선의 초상화(이항복 초상, 이재 초상, 서직수 초상)와 김홍도의 <군선도>, 정조대왕의 <국화>, 추사 김정희와 허련의 <산수> 작품에 대한 선생의 글 등 10꼭지를 더 보충해 조선회화사를 체계적이고 너른 시야로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4 국립중앙박물관의 새로운 전시용어 체계에 맞추어 표제와 용어 등을 고치고 미술사 용어 등 어려운 어휘에는 간단한 주석을 달았다. 이를테면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물을 바라보는 선비>로, 조속의 <노수서작도>는 <나무 위에 앉은 한 쌍의 까치>로, ‘청자상감과형주자’는 ‘청자 참외 모양 주전자’등으로 바꾸어 이해를 쉽게 했다. 다만 우리말로 문화재 용어를 순화하고자 했던 최순우 선생의 선구적인 노력과 그의 독특한 관점이 드러난 명명은 그대로 두었다. 예를 들면 선생이 조선 공예가 보여주는 추상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통칭 ‘분청사기조화선조문 편병’을 ‘분청사기 추상무늬 편병’으로 명명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 하나 선생의 특기할 만한 해석은 신윤복이 ‘비구니가 기녀들을 맞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통칭 <이승
영기尼僧迎}妓>)에 대해 선생은 <봄나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이다.(본문 233쪽) 즉 그림에서 여인들을 맞는 이는 비구니(尼僧)가 아니라 ‘여인들의 아랫도리 흰 속곳을 훑어보고 있는 승려’이며 ‘과거 우리 사회의 남녀군상이 보여주는 생태의 이면상을 보인 것으로 자못 주의를 끌 만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요즘 세인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혜원의 <미인도>도 선생의 눈에 특별한 존재로 비친다.(본문 201쪽) 모두가 그림 속 주인공을 기생으로 보는 데 반해 선생은 ‘지체 있는 선비의 소첩’으로 지목하고 있고, 공민왕의 <노국공주 초상>이 남아 있다면 이 <미인도>와 짝을 이룰 명품이었을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 ‘한국미 전도사’ 혜곡 최순우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한국 미술사학과 미술평론의 토대를 다진 우리 문화사의 거목이었다.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대한 깊은 사랑에다 빼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장을 겸비했고, 이 땅이 순산한 아름다움을 성심으로 보듬어 안은 ‘정 깊은 감식안’이었다. 그는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1943년 개성 부립박물관에 들어간 뒤 40년 동안 한결같이 ‘박물관 인생’으로 살았다. 1984년 작고할 때까지 10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 5천년전’ 등의 대형 해외 전시를 통해 우리 미술을 만방에 퍼뜨린 ‘한국미의 전도사’이기도 했다.
선생은 옛 것에 숨결을 불어넣는 마술사적 문장으로 우뚝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펼치면 ‘연둣빛 무순 향기’ ‘연연하고도 맵자한 앳된 맵시’ ‘백옥같이 갓맑은 살결의 감촉’같은 청초하고 감칠맛 나는 표현들이 쏟아진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이태호(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이원복(국립 전주박물관장) 등 후학들은 선생의 기막힌 문장에 반해 미술사의 길을 걷는 행복을 함께 누린 사람들이다.
? 최순우의 유작이 남긴 아름다운 이야기들
1992년 학고재가 펴낸 첫 책이 최순우 선생의 전집 5권이었다. 『최순우 전집』을 펴낼 당시만 해도 1억 원 이상 들어가는 미술 전집을 내는 건 다들 꺼려했다. 원로 학자들이 최순우 선생의 글로 전집을 묶으려고 하는데 출판사들이 손사래 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학고재 우찬규 사장은 갓 시작한 출판사로서 이를 감히 맡겠다고 나섰다. 이 에피소드는 출판계의 미담으로 회자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전집에서 주옥 같은 글들을 추려내 엮은 단행본이다. 전집의 버거운 분량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쉽게 구입하기가 마땅치 않자, 선생의 글을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선생의 후학들이 달려들어 단출한 체제의 단행본을 꾸민 것이다.
아름다운 저자와 아름다운 글에 아름다운 사연이 없을까. 입에서 입으로 호평을 옮긴 초기 독자들은 이 책을 우리 문화재 관련 대표 도서로 자리매김한 일등공신이었다. 문화방송 프로그램 <느낌표!>에 소개된 2002년 새로 ‘보급판’을 펴내면서 단박에 30만 부가 나갔다.『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미술서 시장이 빠르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책이 불러일으킨 ‘한국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고유섭, 김용준 등이 쓴 우리 미술사의 고전들이 새롭게 조명되도록 했다.
선생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일러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썼다. 부석사에 간 관광객들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지금도 흔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우리 것을 아끼는 모두가 여전히 기대서고픈 기둥인 것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 쏟아진 찬사
최순우 선생은 형언하기 어려운 우리의 아름다움을 글로 나타내신 분이다. 누구나 선생의 글을 읽으면 그분의 글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고 그 속에 함축된 의미와 본질까지를 깨우쳐서 무릎을 탁! 치고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기도 하고 마음이 흔연하고 기쁨이 충만하기도 하고 때론 감동하고 숙연하고 설레기도 한다.
―정양모(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평소에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뜰 수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지체 없이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때의 선생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좋은 선생, 좋은 책으로는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이상이 없다는 대답까지 해오고 있다.
―유홍준(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혜곡 선생님은 한국미의 본바닥에 흐르는 선과 색과 음률의 흥겨움, 그리고 해학과 익살을 샅샅이 읽어 우리 것의 건강하고 정직한 아름다움을 펼쳐내었다. 석굴암 본존의 장대하고 존엄한 원만미를 거쳐 풀꽃과 같은 우리 자연의 청순미에 이르기까지, 옛 선비의 담담한 품위와 세련미를 비롯해 장터 촌부의 소탈미까지, 아울러 공예문화와 건축문화에 담긴 생활미까지, 그분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태호(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 책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아름답고 명쾌한 문장들
흰빛으로 빚어진 어수룩하게 둥근 뭇 항아리의 군상들, 그리고 선의와 치기가 깃들인 지지리 못생겨 이지러진 그릇들, 때때로 목화송이 같이 따스하고 때로는 백옥같이 갓맑은 살결의 감촉.
(68쪽 살결의 감촉, 도자기)
한국은 미국이 아니며 또 일본도 아닌 것이다. 장미는 영국에서 피어야 곱고 국화는 한국에서 피어야 제격이듯이 장미꽃으로 세계를 뒤덮을 수 없고 국화꽃으로 세계를 뒤덮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77쪽 연경당에서)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271쪽 부석사 무량수전)
단순화된 삼산보관 양식과 너그러운 이맛전, 그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촐한 입매에서 풍기는 담담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어질고 너그러운 한국인의 핏줄을 느끼는 듯싶은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환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을 같이 본 서양 학자들도 첫마디에 동감해줄 만큼 우리들에겐 낯익은 인상인 것이다.
(360쪽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어쨌든 나는 지금 샛별처럼 조촐하고 맑은 풍류를 담뿍 머금은 분원 갑번 백자 베갯모에서 풍겨오는 무슨 소리를 분명히 듣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어느 왕공자의 조촐한 숨소리이건 지체 있는 어느 선비의 잠 못 이루는 사색의 소리이건 여전히 흥겨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519쪽 백자 구름학무늬 베갯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