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토목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에든버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도시의 직업 계층이 요구하는 장로교의 관습에 거세게 저항했고, 그로 인해 부모와 갈등을 겪었으며, 그 후 체면을 내세우는 중산 계급이 가지는 잔인성과 위선을 혐오하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을 자처했다. 20대 초반 심각한 호흡기 질환에 걸린 후 남은 인생 내내 그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즈음 작가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1879년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던 중 열 살 연상인 미국인 패니 오즈번을 만나 결혼한다. 그 후 건강에 좋은 환경을 찾아 헤매다 사모아에 정착하고, 1894년 12월 3일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스티븐슨의 작가 이력은 처음 에세이와 여행기 작가로 시작되었으나 『보물섬』(1883)과 『납치』(1886) 출간 후 액션과 모험 소설 작가로 명성이 굳어졌다. 『납치』와 그 속편 『카트리오나』(1893), 『발란트래의 거장』을 비롯하여 「심술궂은 자넷」, 「명랑한 사람들」 같은 단편들은 그의 과거 스코틀랜드 문화에 대한 지식과 향수를 드러내주는 작품들이다. 스티븐슨이 자란 칼뱅주의 성장 환경은 그에게 운명예정설에 의한 의무와 악의 존재에 대한 매혹을 심어주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그는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했으며 『발란트래의 거장』(1889)의 거장 캐릭터는 ‘그가 악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로 그려졌다.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스티븐슨의 창작 영역은 상당히 넓어져서, 『팔레사 해변』은 콘래드와 몸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소설화된 것이었다. 죽는 순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로맨틱 역사 소설이자 그의 일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허미스턴의 둑』이라는 작품을 집필 중이었다.
본명이 엘렌 그웬돌른 리스 윌리엄스(Ellen Gwendolen Rees Williams)인 진 리스(Jean Rhys)는 1894년 도미니카의 윈드워드 군도 중 하나인 로소에서 출생했으며, 16세가 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교육받을 때까지 도미니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웨일즈 태생의 의사였고, 어머니는 영국계 크리올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크리올 문화와 그녀가 어릴 적에 익힌 도미니카의 문화적 유산은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리스의 소설들이 페미니즘적 접근뿐 아니라 제국주의/식민지주의로의 접근을 통한 분석을 하기에 적절한 소설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도 리스가 자신의 독특한 성장 배경을 통해 얻게 된 그녀 나름대로의 관점을 근간으로 소설의 내용을 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녀의 소설들을 호평했지만 독자들에 의해 그녀의 진가가 진정하게 평가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주제와 스타일과 혼이 분명 시대에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면 속에 숨어 있는 편집증적인 내용, 정직하게 다루어진 여성의 성과 심리, 꿈과 현실이 한데 섞여 만들어내는 몽롱한 분위기, 인상주의 기법의 도입, 다자관점을 통한 표현, 그리고 의식의 흐름 수법들이 리스를 뛰어난 모더니스트 작가로 만들어주고 있다. 『굿모닝, 미드나잇』(1939)이 출판된 이후 진 리스는 홀연히 사라졌고 그녀의 작품들은 절판되었다. 1958년『굿모닝, 미드나잇』이 극화되어 BBC 방송의 전파를 타게 되었을 때, 사망했다고까지 알려졌던 진 리스의 행방을 찾아내게 된다. 그 당시 그녀는 소설을 집필 중에 있었으며, 이것이 1966년에 출판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이다. 이 소설이 완성되는 데는 무려 9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제인 에어』에서 브론테에 의해 운명이 이미 결정된 광녀, 버사가 아름다운 앙투아네트로 변모하여 브론테가 못다 해준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진 리스는 노년에도 왕성한 집필 생활을 하였고 1978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작사를 수여받았으며, 1979년 5월 14일 사망했다.
저자 :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년 아룔 현에서 태어나, 포악하고 전제적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27년 가족 전체가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열아홉 살 때 첫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유럽이야말로 참된 지식의 원천을 갖고 있다는 생각으로 베를린 대학으로 떠났지만, 2년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서 모스크바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1843년 스페인 출신 가수였던 폴리나 가르시아 비아르도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르게네프는 비아르도의 유럽 순회공연을 쫓아다녔고, 꽤 오랫동안 파리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의 친구’로서 함께 지냈다. 1856년 이후에는 대부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유럽에서 큰 명성을 얻은 첫 번째 러시아 작가가 되었다. 파리의 문학 서클에서 그는 유명인사였고,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는 그의 친구였으며, 옥스퍼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일련의 여섯 권의 소설, 『루딘』(1856), 『귀족의 보금자리』(1859), 『전야』(19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처녀지』(1877)는 1830년대부터 1870년대 사이의 러시아인들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문학 에세이 및 회고록 이외에도 『시골에서의 한 달』과 같은 희곡, 단편소설, 중편소설 등을 썼다. 그중에서도 중편소설 『사냥꾼의 수기』는 문학적 영향력이 크며, 절정기에 쓴 『첫사랑』(1860)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투르게네프는 1883년 파리에서 병사했고, 러시아에 묻혔다.
1898년 6월 6일 스페인 남부의 푸엔테바케로스에서 태어났다. 강렬한 태양과 자연의 생명력, 다양한 이민족과 뒤엉킨 피의 역사 등 스페인에서 가장 독보적인 지역인 안달루시아의 신비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로르카를 사로잡아 작품 세계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그라나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곧 그만둔 뒤 스페인 인문주의의 보고라 표현될 정도로 유수한 예술가와 학자를 배출한 마드리드 대학의 학생 기숙사 ‘레시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에 1919년부터 기거한다. 이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 등의 문우들과 모임을 함께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의 기반을 닦는다. 첫 책으로 산문집 『인상과 풍경』을 출간한 이후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 연극을 망라하는 예술 전반에 걸친 다양한 활동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스페인의 시적 전통에 음악성과 리듬감, 독특한 비유, 신비적 감각 등을 재생시키는 천재성을 발휘하였으며, 극단 라 바카라를 창단해 스페인 전통극을 상연한다. 이러한 노력은 『피의 결혼식』의 대성공으로 이어지고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이르는 비극 삼부작으로 종결된다. 이밖에도 시집 『칸테 혼도 시집』, 『집시 민요집』 『익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위한 애도』, 희곡 『대단한 구두장이 여인』, 『독신녀 로시타』 등을 출간했다. 스페인 내전 중인 1936년 8월, 고향 그라나다에서 프랑코 정권의 극우 민족주의자에 의해 사살되어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