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부산 출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에 공모에 「기구야 어디로 가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으로 『겨울의 빛』 『수레바퀴 속에서』 『종이로 만든 집』 『그림자 도시』 『물의 여자들』 등이 있으며, 연작소설집으로 『문 없는 나라』 『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날들』, 장편소설로 『떠나가는 노래』 『서서 잠드는 아이들』이 있다. 연암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책상에 앉으면 창 너머, 단풍나무가 보이는 집으로 이사 온 것이 열두 해 전 봄날의 어느 날이다.
열두 해란 시간. 돌아보니 내 삶의 어느 날들 보다도 내 발목을 적신 물이 차가웠던 날들이었다. 작은 마당으로 나가 웃자란 잡풀들을 뽑으면 이러저런 상념들은 사라졌다. 왕벚나무와 감나무의 무성한 잎들 사이로 하늘을 보거나 텃밭의 고추며 토마토를 바구니에 담거나 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그 시간들이 있어 춥고 가난해진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가을이면 탐스러운 대추를 아버지 제사상에 올리게 해준 대추나무. 벌레 때문에 상한 제 몸을 톱날에 내어준 두 그루의 대추나무가 마당을 떠난 게 다섯 해 전이었나, 네 해 전이었나. 그러고 보니 잡풀들하고의 씨름을 그만둔 게 언제부터인지도 잘 헤아려지지 않는다.
내 몸의 어느 부분을 잃어버린 이 년 전 사월의 그날도 언젠가는 잊게 될까. 올 사월. 소리 없는 바람의 일렁임에 따라 허공에서 춤추듯 마당으로 고요히 내려앉던 아름다운 벚나무 꽃잎들. 온 세상이 분홍빛에 물든 것 같았던 그 순간이 눈에 선하다.
이 책이, 딸의 책을 큰 선물로 여기시는 연로하신 어머니께 작은 기쁨이면 좋겠다. 김병익 선생님과 편집부 여러분들,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느 날 진경의 남편, 민지환이 노란 봉투에 담긴 녹음테이프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사라진다. 그 녹음테이프에는 사랑하는 사랑이 생겼다는, 미안하다는 남편의 고백이 담겨 있다. 패션 디자이너로 앞만 보며 달려온 진경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로 인해 지금껏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더구나 일적으로도 변화를 요구하는 중요한 시기여서 그로 인한 고민으로 무척 힘들어하던 중이었던 데다, 남편의 주식 투자 실패로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던 까닭에 진경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고 만다. 가족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은영이 있어 진경은 그나마 힘겹게 그 시간을 견뎌낸다. 기운을 차릴 시간도 없이 진경은 이혼한 첫번째 남편, 장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장헌의 연락까지 받게 된다. 이혼과 함께 다시는 찾지 않았던 아들에 대한 죄책감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고,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전남편 장걸의 소식 역시 괴로운 기억을 떠오르게 함과 동시에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몰고 온다. 그리고 민지환으로부터 유학 중이었던 딸 지나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들어와 명상 센터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어린 나이에 낯선 땅으로 유학을 보내 지나를 외롭게 자라게 했던 것이 미안하기만 한 진경은 지나 앞에서도 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죄인일 뿐이다. 한편 오빠 부부가 어느 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홀로 버려두고 사라지면서 진경은 자신 앞에 놓인 어두운 현실 앞에 갈 길을 잃고 만다. 그러던 중 진경의 재기를 돕겠다며 후원자를 자청하고 김여진이 나타난다. 진경은 김여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그녀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함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김여진은 진경의 이름을 내세워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여 돈을 빌리고는 종적을 감춘다. 그 와중에 진경도 암 초기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게 된다. 이 일로 진경에게 서운한 마음을 풀지 못했던 아들 장헌과 지나도 진경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결국 진경은 치매의 어머니와 함께 아들 장헌과 그의 아내 정혜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아들 부부와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은 시작한 진경은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진경을 친어머니처럼 따르는 정혜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카지노에 빠진 장헌이 결국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 인해 정혜가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겪으면서 진경의 삶도 다시금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음을 깨달은 진경은 은영과 지나의 도움으로 인터넷 쇼핑몰 사업에 뛰어들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면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진경은, 딸 지나가 가정환경 때문에 결혼을 반대당하기도 하고, 한 번 더 사랑에 실패하기도 하고, 자신의 친구 남편과 불륜에 빠진 은영의 모습을 보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가슴 아픈 사건들을 겪어낸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지나의 결혼식이 열리고, 야외 식장에서 온통 분홍빛으로 빛나는 벚꽃나무 아래에 선 진경은 조금 행복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또 어떤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