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비 부근에서 출생했지만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평생 런던 시민으로 살았다. 인쇄업자가 되는 도제 교육을 받은 후 1721년 플리트 스트리트 부근 솔즈버리 코트에서 자신의 인쇄소를 차리고 평생 동안 이 부근에서 일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 그는 '반정부적인 인쇄업자' 블랙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선동적인 팸플릿들을 인쇄하기도 했지만, 1730년대 들어서면서 당대의 정치세력을 받아들이고 의회 관련 문서의 인쇄를 전담하게 되면서 승승장구하여 1754년에는 서적상 조합장까지 지냈다. 1740년 출간된 그의 첫 소설 『파멜라』는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수많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존 켈리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파멜라』와 유사한 작품을 발표하자, 이듬해인 1741년 직접 후속편을 집필하여 출간했다. 이후 1740년대의 대부분을 그의 걸작 『클러리사』(1747~48)를 창작하고 개작하는 데 바쳤다. 만년에도 인쇄업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점차 더 많은 시간을 풀럼과 파슨스 그린에 위치한 은신처에서 저술을 하면서 보냈고 마침내 그의 마지막 소설인 『찰스 그랜디선 경』(1753~54)을 발표했다. 1761년 사망한 뒤, 플리트 스트리트 세인트 브라이드 교회에 안장되었다.
역자 : 장은명
영남대학교에서 윌리엄 블레이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경대학교 강사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토머스 머튼의 『고독 속의 명상』과 『선과 맹금』 등이 있다.
오, 기뻐 날뛰는 내 심장아! 그것은 내 가슴속에서 얼마나 세차게 고동치는지! 그처럼 소중한 신사에 사랑에 꺾였다고 방금 전에 자신을 심하게 질책한 데 대해 마치 비난하기라도 하는 듯하구나!―그러나 너무 쉽게 믿지 않도록 조심해라. 오, 맹목적으로 믿는 심장아!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너무 쉽게 신용을 얻는 경향이 있지 않니. [……] 이렇게 바보처럼 전 제 심장과 대화했답니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이 심장이 바로 파멜라인 걸요. --- pp.64~65
사랑하는 부모님, 부모님의 행복한 행복한, 세 배로 행복한 파멜라는 마침내 결혼을 했답니다. 그것도 누구와?―물론 그녀가 사랑하는 친절한 주인과요! 그녀의 소망의 주인인 분과요!―이와 같이 제 사랑하는 사람은 예전에는 그녀의 순결에 대한 사악한 공격자였지만 지금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섭리로 그녀의 순결에 대한 친절하고 관대한 보호자요 보답자가 되었지요.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받고 찬양받으소서! 그리고 제가 이러한 뛰어난 영광을 받기에 완전히 부족하지는 않게 해주시길!
B― 씨는 그녀를 부모에게 돌려보내기로 하고, 결국 파멜라는 부모를 향해 링컨셔를 떠난다. 파멜라가 떠나자 크게 상심하여 병이 난 B― 씨는 파멜라에게 급히 돌아와주기를 간청하면서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파멜라는 편지를 받고 감동하여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링컨셔로 돌아간다. 마침내 그들은 작은 예배당에서 윌리엄스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 B― 씨가 몸종과 결혼한 것을 의아해하던 이웃 귀족들도 파멜라를 직접 보고 난 뒤에는 그 외모와 품성에 반해 모두들 그녀를 칭송하게 된다. 이제 이 결혼의 유일한 골칫거리는 B― 씨의 누나인 대버스 부인이다. 그녀가 남동생이 몸종과 결혼한 사실에 대해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버스 부인은 링컨셔로 찾아와 파멜라를 모욕하고 B― 씨와 심한 언쟁을 벌이지만, 파멜라가 B― 씨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들에 대해 거짓 없이 쓴 편지들을 읽고 난 뒤에는 파멜라에게 동정을 느끼고 그녀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다. 이후 파멜라는 늘 주변에 모범을 보이고 현명한 자선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미덕과 자선에 대한 보답을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