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머리를 따라가면서 글을 쓸 수 있다. 일일이 글자를 적는 키보드에서의 글쓰기는 사실상 이전의 글쓰기에 비해 머리를 따라가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거기에 자판의 오른쪽 위에는 '백스페이스'가 있어, 마음만 있으면 쓴 글을 곧바로 지울 수 있다.)
이런 형식으로 난 소설을 써봤으며, 당선되지도 않을 드라마도 두편이나 써봤다. 그런데 평론도 그렇게 쓸 수 있을까. 정과리의 평론집을 읽으며, 난 저자가 머리가 가는 데로 열심히 쓴 다음에 손을 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문제는 그의 머리가 나의 머리와 너무나 멀다는데 있다. 이번에 내놓은 평론집 '무덤 속의 마젤란'은 우리 평론집중에서는 드물게 하나의 주제로 책 전체를 일이관지하는 책이다. 그 긴 삼지창은 '죽음'이다. 그 노고는 힘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난 그의 글들을 읽을 수 없다. 기형도에 관해서 열심히 적고 결론에 '형태론적 꺽꽂이 혹은 흡지(吸枝), 그것은 타자를 주체 안에 넣는 행위 자체가 그대로 주체를 저의 바깥에 세우는 행위로 전화된다는 구조적 특성에 있었다. 그것은 오직 기형도 만이 만들어낸 시의 존재태이다'라고 적는다. 뭐 전체에서 하나를 발췌한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이 글은 이 책에서 가장 쉬운 부분중에 하나니 오해말기를. 오해하거나 말거나 난 소위 평론가라는 이들이 똥으로 가득찬 듯한 머리에서 쏟아나오는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싫다.
정과리 스스로도 항상 벽처럼 느낀다는 김현선생의 기형도 발문이 명문인 것은 김현선생이 기형도의 시를 확실하게 관류했을 뿐만 아니라, 나 같이 문학용어에 익숙하지 않고(그래도 국문학 전공했고, 철학공부도 할 만큼 했다고 자부하는) 프랑스 최신 문화비평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썼다는 것이다.(사실 김현 전집은 대부분 읽기 편하다) 하지만 정과리의 텍스트는 내가 보기에 이도저도 아니다.
우선 책의 문제는 죽음이라는 무거우면서 행복한 소재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진이정이나 기형도 등 요절한 시인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다루는 평론은 되지 않는다. 이승하 등 죽음을 소재로 썼다고 해서 죽음에 관한 시인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고 마찬가지다.
나로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이런 앞에서 인용한 표현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면 책을 읽어도 좋을 듯 하다. 최소한 언급된 시인들은 중요한 검색대상들이니 말이다.
'독자는 애초에 그가 90년대 시의 집단적 명제라고 파악했던 것으로 되돌아간다. 죽음으로 사는 생! 그러니까..... 생의 끝없는 유예, 죽음의 끝없는 결핍..... 그래서, 무덤 속의 이 오랜 방랑 ...... 소란하기 짝이 없는 침묵들 ..... 이 고삐에 매인 영문 모를 헛소리들, 헛소리들, 고삐가 자유인 착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