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말 문명은 '너희를 자유케 할'것인가? 별로 의심할 게 없다는 듯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컴퓨터 문명이 현시하는 모든 종류의 자유와 능동성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사용자에게 금지된 구역이 있다. 바로 그러한 자유와 상호성을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서의 컴퓨터 체계들이 그것이다. 하드웨어 규격, 운영 체계, 통신규약, 프로그래밍 등등이 그 기간 체계들이다. 그 체계들이 현상적으로 사용자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거꾸로다.
우선, 컴퓨터 문화 내에서 생산과 수용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문자와 동영상과 소리 등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복합 텍스트다. 그것은 보통 문서에 비해 훨씬 감각적이고 쉬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실제의 하이퍼텍스트는 아주 복잡한 언어와 구문에 의해 작성된다. 하이퍼텍스트의 원본에는 이상한 기호들과 문자가 암호문처럼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삽한 원본이 일정한 디코딩 과정을 거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서로 재탄생한다. 또 다른 구조적 문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용법이 편리해지면 질수록 그 체계로부터 사용자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컴퓨터가 약속하는 자유와 상호성은 원초적인 구속을 은폐하고 있다. 그것들은 향수의 장 내에 국한되어 있을 뿐,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의 생산 지대로는 사용자들은 거의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데, 그 조건의 생산 지대는 결코 중립지대가 아니다. 그곳에서 자유와 상호성의 기본 형식이 이미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문명이 주는 선물은 선물(膳物)이 아니라 선물(先物)이다.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 대가는 기술 문명 체제 속으로의 예속을 말한다. .......(중략) 나는 여기에서 어떤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현상적으로는 그 체계가 오히려 재래의 문화보다도 더 개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현상적 개방성을 간단히 위장술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용자는 조작법을 익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체계의 원리에 대한 지식을 쌓고 그것을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을 나누는 작은 모임들이 활발이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