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으로 보면 피노키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림책이라는 제약 때문에 더욱더, 길고 길게 펼쳐지는 피노키오의 모험들을 한두 문장으로 압축해놓았기 때문에 인물들의 행동에 개연성이 전혀 없다. 학교에 가던 피노키오가 왜 극장에 가고, 극장의 흥행사가 왜 갑자기 피노키오에게 왜 극장을 가고, 극장의 흥행사가 왜 갑자기 피노키오에게 돈을 주고, 별안간 천사는 어디서 나타났고, 피노키오는 왜 거짓말을 하는 지, 여우와 고양이와 재판관과 감옥의 관계는 어떻게 된 건지......
--- p.177,---pp.9-17,---본문 중에서
애니메이션 그림책들이 이야기를 줄이느라고 작품 내용을 변질시켜놓은 것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늑대와 아기돼지의 관계다. 원본의 첫부분에 나오는, 엄마돼지가 들려주는 늑대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아기돼지 이야기는 애초에 늑대의 존재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늑대는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를 잡아먹는다. 엄마돼지가 미리 우려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셋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혀 먹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아기돼지를 얕잡아보던 늑대도 셋째 돼지와 속임수를 써가며 싸우던 중에 생각이 조금 변한다. "몇 번 만나는 동안 아기돼지가 매우 좋아졌"으며 "그에 대한 존경심마저 싹"트는 것이다.
길 떠나기 전, 엄마의 보호 아래 태평스럽기만 하던 아기돼지들, "언제까지나 행복하리라고 믿었"던 아기돼지들을 바라보던 엄마돼지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늑대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늑대와 아기돼지의 관계는 약육강식이라는 개념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셋째 돼지는 이제 늑대라는 위험을 극복할 힘을 스스로 키워나가고 있다. 사실,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또한 사실은 이렇다. 약육강식은 현실이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그림책들은 늑대로 하여금 아기돼지들을 잡아먹게 만들지 않는다. 초가집도 날아가고 나뭇가지집도 날아갔지만 첫째 돼지도 둘째 돼지도 셋째 돼지의 벽돌집으로 피신시킨다. 그리고 늑대도 아기돼지들도 아무도 죽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 pp.157-158
아이들에게 책을 사줘야 한다고 하면 프랑스 부모들은 화를 냅니다. 책은 아이들에게 '주는'것이라고 생각하지요.
--- p. 228
그 지루함을 참는 힘을 기르는 일이 독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것만이 그 교육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루함을 견뎌내는 힘,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력을 길러주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될 수도 있고, 등산이나 수영, 오래 달리기 같은 스포츠를 통해서도 얻어질 수 있다. 사실, 책 읽는 힘은 저절로 길러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따로 훈련받지 않아도 누구나 대중 음악을 즐길 수는 있지만 클래식 음악은 일정한 연습을 통해서 맛을 들이지 않으면 어렵고 지루하게만 다가올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아이에게 책의 맛을 알게 해줄 것인가?....
--- p.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