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살고 싶다. 자기 자리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세월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가끔은 누군가 찾아와 기대고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이 변하더라도 속마음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그루 나무처럼 말이다. --- p.22
혼자 음악을 듣는 일이 전처럼 그렇게 즐겁지가 않다. 그 대신 나는 음악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뜨였다. 이를테면 주방에서 아내가 설거지하는 소리, 물기가 마른 그릇을 찬장 속에 하나씩 쌓아놓는 소리, 베란다에서 빨래의 주름을 펴기 위해 옷을 터는 소리,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며 조용히 웃는 소리, 밤이면 아이에게 다분다분 동화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을 때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온몸에 따뜻하게 깃들곤 한다. 그것은 혼자 어두운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자아도취적 감정에 빠져 있을 때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구체적인 삶의 평화이다. --- p.25
언 땅에 묻어둔 김장김치나 된장 항아리 속에 박아둔 무 장아찌처럼 오래 묵은 것일수록 깊은 맛이 나게 마련이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렇듯 사소한 몸짓에서부터 깊은 맛이 우러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p.33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영원한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마다 매순간 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며 우연한 만남에도 저 신비롭고 불가해한 우주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 p.68
대개의 사람들은 죽음을 단지 어두운 것, 두려운 것, 의식적으로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죽음이 존재하기에 삶을 더욱 탄력 있고 오히려 풍요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모든 생명은 빛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본시 어둠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어둠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우리는 나날이 고된 삶을 살고 있으나 동시에 화사한 죽음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p.72
내가 봄을 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흔 살 무렵이었다. 바야흐로 나뭇가지에 연둣빛 새싹이 돋고 산마다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인가? 라는 새삼스러운 의혹에 시달렸다. 그래서 봄은 내게 아름답다기보다는 오히려 서글픈 정조를 불러일으켰다. --- p.82
그래, 누군가 삶에 지쳐 소리 없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또 누군가는 가슴에 맺힌 그리움으로 먼 바다의 고기떼를 부르고 저 자신은 흰 꽃이 되어 산자락에 홀로 만발해 있었던 것이리라. --- p.132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래, 그것뿐이었다. 지금껏 아비에게도 단 한 번 굽히지 않았던 내가 기어이 문학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남자 나이 마흔이 됐으니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 p.160
5월 말에 회사에서 당선 소식을 받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비로소 작가가 된 내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퇴근 후에 나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혼자 밤늦게까지 세종로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시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 소식을 알렸다. --- p.164
자연의 변화란 곧 우주의 섭리일 테고 사람살이의 질서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서둘러 말하고 한 줄의 글을 쓰는 일보다 스스로 세상의 섭리를 터득하고 무릎 꿇고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 p.179
“돌아오니 눈 속에서 꿈을 꾸다 깨어난 느낌이었다. 주위의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고 가족도 처음 만난 듯 생소해 보였다. 그동안 나는 어디에 가있었던 걸까. 두 달 동안 산속에서 쓴 소설을 읽어봐도 역시 뭔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서야 비로소 나는 현실로 돌아왔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된장국에서 진한 냉이 냄새가 났다. 그것은 기다림의 냄새였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만큼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풀에 길을 잃고 말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기다리는 삶보다 더 힘든 삶은 없다는 것을 이번에 나는 알게 되었다.” --- p.197
이청준, 김승옥, 오정희, 윤흥길, 윤후명, 조세희, 박완서, 최인호 선생 등등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벅찬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가난하고 누추하지만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았다. 그때가 바로 내 삶에서‘돌아보니 푸른 파도’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