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 사고가 터진다. 급식 지도하던 담임 선생님 앞에서 국자를 집어던지고, 반 친구에게 기분 나쁜 놈이라며 라이터로 급소에 불을 지르려 했던 일도 있다. 창문 난간에 올라 운동장으로 뛰어내리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녀석도 있었다. 지금 아이들과 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서로를 사람으로 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대체 얼마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기에 그런 괴물로 변해 버린 것일까. 그건 그들이 십수 년 동안 이런 말을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를 못하면, 일류 대학에 가지 못하면, 돈 잘 버는 직업을 갖지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 pp.12-13
때로 인생에서 원치 않게 바보가 되는 때가 있다. 그 충격이 가장 큰 시기는 아마도 감수성이 예민한 학창 시절일 것이다. 성격이 강하고 외향적인 아이라면 바보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회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극도로 소심한 아이가 수십 명의 친구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면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중학교에서는 10월 즈음이 되면 왕따 사건이 빈번하게 터진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비해 몇 배나 늘어난 학습량에 허덕이다가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날 즈음 지칠 대로 지쳐 버린다. 이때쯤에는 중학교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게 되면서 마음마저 느슨해진다. 그중에서 부모로부터 억압을 많이 받는 우등생들이 종종 예기치 못한 폭탄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연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왕따 행위’로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pp.50-51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찬정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찬정이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씨앗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찬정이도 서머힐 아이들처럼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아이’가 될 거라 믿었다. 무엇보다 찬정이는 눈빛이 살아 있었다. 내가 찬정이에게 강조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찬정아, 선생님은 네가 어떤 잘못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해. 순간의 실수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학교 규칙을 어길 수도 있어.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너는 그럴 때마다 반드시 한 가지씩 배워 가면 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거야. 지난번 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회에서 교내 봉사 3일 징계를 받았잖아. 여기에서 뭘 느껴야 할까?” “또 그런 위원회가 열리면 안 된다는 거요….” “왜 안 되지?” “교내 봉사를 5일 이상 받게 될 거고, 그러면 회장도 그만둬야 하니까요.” “그렇지!” --- pp.96-97
세상 쓴맛을 다 본 사람처럼 수진이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젠 아빠가 무섭지도 않아요. 아빠가 때리면 가출해 버릴 거예요. 작년에도 아빠가 때려서 두 달 동안 친구네서 살았어요. 그때부터 아빠는 몽둥이를 옆에 놓고 협박만 해요.” 잃을 게 없는 수진이가 가장 싫어했던 건 핸드폰을 뺏기는 일이었다. 시험이 끝나는 날 아빠에게 핸드폰을 뺏긴 수진이는 금단 현상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교실에서 지내는 게 너무 힘들어요. 나 말고 다른 애들은 전부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 같아요. 쉬는 시간마다 은별이에게 문자 보내고 통화를 할 수 있을 때는 견딜 만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핸드폰이 없으니까 정말 정신병자가 될 거 같아요.” 수진이는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풀어내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수진이에게 수업보다 대화가 더 시급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3학년으로 진급하느냐, 못하느냐는 둘째 문제였다. --- p.118
영호의 첫사랑은 일주일도 채우지 못한 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나는 영호의 이야기를 소재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고는 다음 해 학교 축제 때, 아이들과 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15분짜리 영화를 만들어서 교내 상영을 했다. 아이들은 영호의 오그라드는 대사와 행동이 나올 때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영호의 첫사랑은 자기애에 갇혀서 사랑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너무 많이 사랑해서’ 실패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연애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랑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다. --- pp.150-151
아이들이 가면 속으로 숨거나 가면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학교에서 정규 수업을 잘 받는 학생. 방과 후 학원에 가서 밤 10시까지 공부를 성실히 하는 학원생. 집에 와서 밤늦게까지 숙제와 예습 복습을 충실히 하는 학생. 논술 대비를 위해서 꾸준히 책을 읽는 학생. 내신 관리를 위해 과목의 수행 평가까지 완벽하게 제출하는 학생…. 중학교가 대충 이 정도다. 이 가면의 실체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슈퍼맨 가면이다. 누가 이토록 지독한 페르소나를 우리 아이들의 얼굴에 씌워 준 것인가. 인간에게 슈퍼맨은 가능하지 않다. 그건 기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공부 기계가 되거나 아니면 비뚤어진 날라리가 되거나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찌질이가 되거나.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너무도 협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