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할머니다.”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할머니는 내가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려 주었다.
내 할머니라니. 그렇다면 아버지의 어머니란 얘기고 할아버지의 아내란 소리며 어머니의 시어머니란 말씀인데. 가만있자, 이건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부활하신 것이었다.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며 그녀에게 돌진했다. 커다랗고 동그란 할머니 눈이 더 크게 벌어지는 걸 보며 조그만 몸뚱이를 힘껏 껴안았다. 눈물이 나면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언제나 그렇듯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괜찮았다. 눈물 없이도 충분히 감격적인 할머니와 손자의 첫 만남이었으니. 이 노파가 거짓말을 한다거나 어떤 오해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나타나 자신이 부활했다고 밝혔을 땐 분명 거짓말이나 오해일 것이라고 생각해야 정상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런 생각을 하기엔, 그래서 이 기막힌 순간에 감격치 않고 냉정을 찾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무료했다.---「할머니가 돌아왔다」 중에서
“아니다, 너희는 내 재산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달자가 여기저기 안 알아본 곳이 없다. 내게 너희들 소식을 들려준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이준용 목사, 바로 부여에서 우리 아랫집 살던 꼬마 아이 말이다. 어제 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달자가 거기까지 연락해서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것을 알아냈지. 그리고 달자는 다른 건 안 물어보고 택시 회사만 물어봤더군.”
고모도 어머니도 동생도 할머니 시선을 피했다. 승기를 잡은 할머니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마치 승전가처럼.
“난 너희에게 거짓말한 적 없다. 일본에서 택시 회사로 돈 번 것은 맞다. 거기서 미국으로 갔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샤롯데 시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가 부흥 설교를 하러 온 이 목사를 만나 너희 소식을 들었고 무려 삼 년을 고민하다 이번에 찾아왔다. 함께 산 남자는 둘이 있다. 일본인 하나, 미국인 하나. 일본인과는 이별했고 미국인과는 사별했다. 자식은 없었다. 너희 둘이 다야. 달자야, 넌 이런 것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위대한 유산」 중에서
“그런데 네 대답은, 기막혀서, 날 개잡년이라고 하면서 세상이 바뀌면 반드시 돌아와서 맷돌로 갈아 버리겠다고 혔어, 안 혔어?”
“민족을 배신하고 지아비를 배신한 년인데 당연히 그래야 혔지.”
“넌 마누라 말을 믿어 주지 않았어.”
“네 년이 먼저 후지오카인가 후리오카인가 하는 쪽발이하고 붙어 먹었잖여.”
“내가 붙어먹는 거 네가 봤간디?”
“다 들었어, 이년아. 67년이여, 이제 67년 세월을 보내고 그걸 뒤집으려 하면 안 되는 거여. 지난 67년이 내겐 하루도 빼지 않고 피가 끓는 세월이었지만 끝순이, 네가 그냥 잘못혔다고 하면 죽을 때 다 되었으니 받아 주진 못혀도 용서할 마음은 있어. 그러니까 괜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잘못혔다고 한마디만 혀라.”---「피끓는 67년」 중에서
난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늘 눈물이 없어 걱정했는데 이번엔 저절로 줄줄 흘러내렸다. 두 손을 모았다. 모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제발 현애를 살려 달라고. 현애를 용서해 달라고. 난 내 스피드를 알았다. 내가 몸을 날려 현애를 구해 낼 확률은 불행히도 제로였고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눈물을 흘리며 싹싹 비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난 창피하지 않았다.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안도현은 말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상우 목소리가 찼다.
“넌 개다.”
“맞아, 난 개야. 그러니까 현애를 풀어 줘.”
“짖어 봐.”
“왈 왈 왈.”---「끝까지 신파」 중에서
할아버지는 긴 시간에 걸쳐서 쉬엄쉬엄 유언을 했다. 난 고개만 끄덕이다가 결국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가족과의 작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아픈 일이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가족과의 인사를 끝낸 할아버지. 눈을 돌리며 할머니를 찾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가족이 아닌 연인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할머니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친척들이 떠나자 다시 나타난 할머니는 붉은 뺨을 씰룩대면서도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 앞에 나아가 그의 마른 손을 잡아 주었다.
“끝순아.”
“그래, 종태야.”
“끝순아.”
“그래, 종태야.”
“끝순아.”
“그래, 종태야.”
할아버지가 살짝 웃었다. 할머니도 따라 웃었다. 그러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