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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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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 EPUB ]
이한우 | 해냄 | 2012년 08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0 리뷰 1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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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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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년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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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2.96MB ?
ISBN13 9788973379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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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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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은 전통과의 결별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홀로 내린 결단이었다. 그가 배재학당으로 돌아온 지 2개월쯤 지난 1896년 5월에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徐載弼, 1863~1951년)이 매주 목요일 배재학당에서 열리는 세계지리, 역사, 정치학 및 의사 진행법 등에 관해 특강을 시작했다.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개업의로 있다가 1895년 말에 박영효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했다. 전통을 버리고 근대의 문턱을 넘긴 했지만, 스물두 살 청년 이승만에게 ‘근대’는 여전히 모호하고 낯설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때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최고의 선진문물을 몸소 겪은 서재필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승만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응원군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서재필은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체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 「2장 개화 청년」 중에서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이 대안으로 생각한 정치 체제는 국민들의 자유와 평등권이 보장되는 입헌군주제나 민주공화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 제도를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민주공화제로 나눈 다음 전제군주제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영국이나 일본 같은 입헌군주제가 당시의 현실에 맞는다고 밝힌다. 그러나 총 52장으로 된 이 책에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에는 1장 정도만을 할애하면서도 그가 ‘민주공화제’로 분류한 미국에 대해서는 무려 4장에 걸쳐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가 궁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군주가 없는 민주제’, 즉 공화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이승만이 책의 서문에서 완성된 날짜를 ‘건국 4237년 6월 29일’이라 하여 당시 흔히 사용되던 조선 왕조 개국 기원이나 광무 연호 대신 단기를 사용한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 「3장 한성 감옥 속에서」 중에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신앙 간증 강연은 계속했다.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메모를 보면 이런 강연을 통해 번 돈이 2~3달러 많게는 30달러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즐겁게 강연 활동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조국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 한국을 도와줄 친구들을 만들어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승만은 이역만리에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연설했기에 미국인들을 상대로 해서 지속적으로 강연을 할 수 있었을까? 올리버의 전기는 이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연설은 주로 YMCA 주최로 열렸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동부 도시에 있는 수많은 단체들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었다. 어떤 때는 70장에서 100장에 달하는 사진을 환등기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제(演題)는 언제나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 사업과 한국인의 점진적인 향상에 관한 것이었다. ― 「5장 밀사 실패 후 결심한 유학」 중에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 소(小)조선’을 만들 포부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와이 순회여행 도중 이승만이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한인 소녀들의 불쌍한 처지였다. 아예 학교를 다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어려서 중국인이나 하와이 본토인에게 팔려가 한국말을 모르는 여자 아이들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들로부터 결혼을 강요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7월 29일 이승만은 여행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귀환하면서 그중에서도 사정이 어려운 소녀 여섯 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이때는 아직 이승만이 교장으로 취임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일단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운영하던 수잔나 웨슬리 홈에 소녀들을 맡겼다. 그곳의 사감이던 앤더슨은 “당분간 이 아이들을 맡아주겠지만 공립학교에 보내 다른 인종들과 융화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인은 한국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바람에 한인중앙학교가 개학할 때 소녀 여섯 명도 입학했고, 다른 소녀들도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바람에 11월 기준으로 등록한 학생 99명 중 18명이 여학생이었다. 손세일은 “이로써 이승만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녀공학을 실천한 사람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 「7장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다」 중에서

1945년. 이승만은 만 70세였다. 이승만은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유엔 창립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정부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석하기 위해 ‘임정 대표단’을 구성했다. 문제는 연합위원회 워싱턴 사무소와 중한 민중 동맹의 한길수도 각각 회의 사무국에 참석을 신청한 것이다. 다시 분열상이 드러났다. 이들은 며칠간의 논쟁을 거쳐 겨우 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접수 자체를 거부당했다. 사무국장이 친소 인물인 앨저 히스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1945년 8월 15일까지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945년 8월 14일 밤 11시(미국 시간), 일본의 항복 소식이 라디오 임시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이 시간 바로 곁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회고담이다.

그분은 임시 뉴스를 듣다 말고 벌떡 일어나셨어요. “이봐, 일본이 항복했어. 우린 귀국하는 거야.” 그분은 제 손목을 꽉 붙잡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죠. 그저 눈물을 글썽이면서 제 손만 꽉 잡고 계셨습니다. 전 얼떨떨한 가운데 이분이 너무 흥분하셔서 어쩌나 하는 염려마저 들었습니다. ― 「9장 전쟁의 발발로 끝맺은 암중모색」 중에서

10월 31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장장 네 시간 동안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은 ‘독촉’의 존재를 3천만의 총의를 모은 통일된 기관으로서 시인하여 주는 동시에 여기에 힘을 합쳐줄 수 없겠느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선숙청, 후통합의 입장을 견지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승만은 이에 “성스러운 건국 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지 않느냐”며 재차 설득했으나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돈암장 회담은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채 외형상의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발표됐다. 이승만은 11월 1일 여운형과도 만남을 가졌다.
공산당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는 이승만이 12월 19일 방송을 통해 명확한 반공(反共) 노선을 표명하기까지 계속된다. 그만큼 이승만이 ‘독촉’의 명분 확보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오히려 우파 진영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우익지인 《대동신문》은 12월 8일자에서 “(좌파와 연합을 시도했던) 그 결과가…`… 이 박사의 한참을 나가던 인기 고무 풍선이 순식간에 급강하 저공비행을 하게 된 것이다”라며 이승만의 좌파 회유 노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이미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정식으로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6일 독촉에서 공식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이승만과 공식 결별했다. 이에 이승만은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이승만과 박헌영은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 「10장 광복과 건국」 중에서

사사오입 개헌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자유당은 철저하게 이승만의 개인당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다수 여당이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함으로써 결국 의회 전체의 행정부 견제 기능이 마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물론 여기서 의회의 강력한 견제가 반드시 긍정적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이승만 식의 자유당 창당이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자유당 창당은 이승만의 통치가 원론적인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바뀌는 전환점이었다는 것이 정치학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권력 기반이 강화된 이승만이, 그 동기가 설사 애국적인 데서 비롯됐다 할지라도 정치 행태 면에서 권위주의로 기울어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13장 6·25 전쟁, 전략가 이승만」 중에서

4·19 당시 민권의 승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 발표이다. 이승만이 하야를 결심하게 된 시점 및 과정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1995년 말 필자가 《조선일보》에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고 있을 때 하야 성명이 나오게 된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유일라(兪一羅, 본명 주봉, 당시 59세)가 직접 찾아와 3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경무대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전부 털어놓았다. 유씨는 1960년 4월 26일 데모대 대표 다섯 명 중 수석 대표로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결심을 받아낸 장본인이다. 그의 증언은 시민 대표가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었던 배경에 군의 도움이 있었다는 비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하야를 결심했다는 결정적 증거, 사태 직후 군정 실시의 움직임이 일부 있었지만 좌절된 이야기 등을 고스란히 밝히고 있다.
― 「15장 거인의 최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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