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이다. 우리 근현대사를 쓴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비극에 맞대면하여 슬픔을 감내하는 일이다. 하지만 비장하고 엄숙한 방식만으론 그 비극 속에서도 징그럽도록 끈질기게 존재했던 인생을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 기실 소수의 큰사람을 제외한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란 너덜너덜한 일상을 가까스로 짜깁기한 남루한 누더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하여 결국 나는 그 비극 속에서 가장 희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희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비극적이고, 인간적인.” --- 〈작가의 말〉 중에서
‘돈! 돈을 벌어 출세해야 한다!’
아버지는 고작 열일곱 살의 소년이었지만 무섭도록 빠르게 세상에 적응해 갔다. 청계천 거지굴에 기거하며 동냥밥을 얻어먹고 다니던 아버지는 때마침 건설 중인 한강 인도교 공사 현장에 잡일꾼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야말로 거지가 꿀 얻어먹듯 천우신조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으나 그 모두는 아버지는 자기부정에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아버지는 거지꼴을 하고도 자신이 거지라고 생각지 않았고, 막일꾼으로 등짐을 지고 줄다리를 숱하게 오르내릴 때에도 자신이 막일꾼으로 머물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1917년 가을에 마침내 다리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인도교 준공의 총지휘자라도 되는 양 자부심을 느꼈다. 훗날 자가용을 뽑아 시승할 때에도 아버지는 기사에게 제일 먼저 한강 인도교를 건널 것을 주문했다.
“보라구! 이게 바로 내가 만든 다리야!” --- 〈진짜 아버지〉 중에서
“이 머저리야, 빨리 웃어!”
나는 뭔가를 잘못 들은 듯싶어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오른팔을 뻗어 반바지 아래 타이즈를 신은 내 허벅지 안쪽을 모질게 꼬집었다. 아아, 얼마나 따갑고 아팠던지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자, 다시 한 번 찍습니다. 어머님은 아이들과 몸을 좀 더 붙이시고, 꼬마 신사분들은 솜사탕을 한 입 크게 베어 물 때처럼 입을 벌려 웃으세요. 다 같이 여기 보시고요. 찍습니다!”
미처 눈물이 고일 틈도 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나는 어쨌거나 입을 벌씬 벌리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사진에 찍혔다. 웃음이나 울음이나 어차피 받침 하나 차이였다. 잡지에 실린 가족사진에서는 내 아픔이나 놀라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도련님의 모습으로 좀 멍하고 맹해 보일 뿐이었다. --- 〈홈, 스위트 홈〉 중에서
“가와모토 유지를 면회 왔습니다.”
“수감인과는 어떤 관계인가”
“동생입니다.”
“가족 면회는 이 인까지 가능하다. 신청자는 일 인뿐인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꾸욱 찔러왔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난생처음 보는, 그러나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여자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아니오. 이 인입니다.”
“수감인과는 어떤 관계인가”
“……약혼녀입니다.”
사무적으로 서류를 작성하던 구치소 직원이 돌연히 끼어든 그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단 직원이라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무언가를 정탐하는 듯한 눈빛이 매서웠다. 그때 옆구리를 찌른 뾰족한 물체(나는 왜 그걸 언뜻 ‘칼’이라고 생각했을까)에 힘이 가해졌다. 어제 마신 술이 다 소화되지 않아 꿀렁거리는 배가 다시금 요동을 쳤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왈카닥 게우듯 말했다.
“네, 맞습니다.” --- 〈만남〉 중에서
형이, 최형철이, 하경식이, 카와모토 유지가 전향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적’들은 의외의 지점에서 형을 무너뜨릴 비책을 찾았다. 아버지의 속물성과 천박함을 경멸하며 어머니 대신 손찌검을 받길 자청하던, 정작 어머니는 고까워하는 외가의 독립운동 내력에 그토록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어머니의 성씨와 항렬을 따라 가명을 만들 정도로 애착과 동질감을 느끼던 형에게 내가 바우 할아버지에게서 얼떨결에 들었던 ‘출생의 비밀’을 까발린 것이었다. (중략)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양반출신으로서는 자신만만하게 ‘해방’을 외치다가 백정 출신임이 밝혀지자 이마빡에 번갯불이라도 맞은 듯 안면을 바꾼 이유가 뭔가 백정이라기엔 너무 똑똑해서 곤란한가 백정이라기엔 너무 잘생겨서 곤란한가 내 돌대가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짱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인데, 질펀한 술자리는 본체만체하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거실을 가로지르는 어머니를 향한 형의 눈길에서 뜻밖의 빛을 발견했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형의 눈빛이 아버지의 그것과 꼭 같았다. 혹시 형은 자신의 핏줄에 흐르는 것이 천한 백정의 피라서…… 창피하고 부끄러웠단 말인가 열등감과 보상 심리를 느꼈단 말인가 에이, 설마……. --- 〈형〉 중에서
현옥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갑자기 삶과 죽음에 대한 분별심이 솟구쳤다. 죽기 싫어졌다. 맹렬하게 살고 싶어졌다. 나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삶의 의지가 퐁퐁 샘솟았다. 물론 현옥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꼭 깨물며 한 다짐은 아니지만(난 생겨먹기를 그렇게 진지하고 엄숙한 종자가 아니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느니 내가 대신하는 편이 분명히 나았다. 하지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물거품을 뿜으며 달려드는 파도 앞에서 나는 거듭거듭 스스로를 향해 질문했다. 어느새 나도 형을 닮아 속말이자 참말을 함부로 발설하는 걸 주저하게 된 건지, 진짜로 부르짖고픈 말을 통역하자면 아마도 이쯤일까
“빌어먹을, 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고 싶다고!” --- 〈첫 키스〉 중에서
세키가 이끈 부대의 공식 명칭은 ‘신푸(神風) 도쿠베츠-고게키타이’, 줄임말로 ‘독고다이’라고 부르는 특별공격대였다. 하지만 요미가나(한자를 일본어로 읽는 방법)에 익숙지 않은 미군 내의 니세이(일본인 2세)들이 ‘신푸’를 ‘가미가제’라고 부르면서 나중에는 공식명보다 별칭이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는 미친놈들만 빼고 다 알았다.(아니, 어쩌면 미친놈들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최초에 자살 공격을 명령한 해군중장 오니시와 그의 참모들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250킬로그램의 폭탄의 위력은 만만찮았지만 항공모함을 침몰시킬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이 화재를 일으켜 한동안 갑판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판을 망치는 정도의 ‘엄청난’ 전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조종사들의 ‘하찮은’ 목숨이 무수히 필요했다. 타고난 흥정바치인 아버지를 붙잡고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이게 도대체 이문이 좀이라도 남는 장사인가요
--- 〈사육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