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이 아닌, ‘모티베이션’에 대한 고민. ‘안이냐 밖이냐’가 아닌,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발상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왜 꼭 개구리여야만 하는 거지? 왜 꼭 정처 없이 뛰어다녀야만 하는 거지? 난, 개구리가 아닌 달팽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조금 느리긴 하지만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은, ‘우물 밖 달팽이’ 말이다. --- p.11
숙소 말고 방을 구하기로 했다. 가이드북 말고 텍스트북을 들기로 했다. 이곳저곳 찍는 대신 한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거점을 두고 살면서 하는 여행. 내 선택은 7년 전 마음을 빼앗겼던 눈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탁 트인 지중해를 품은 도시 바르셀로나였다. --- p.18~19
“시내까지 얼마나 걸려요? 이리 가는 게 맞아요?” 서툰 스페인어로 떠듬거리는 동양인이 재미있는지 덩달아 말이 짧아진 기사 아저씨의 맞춤형 답변이 기가 막히게 시원스러웠다.“또도렉또! 또도렉또(인생 뭐 있어 기냥 직진야)!” --- p.29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스페인어로 ‘성스러운 가족’이라는 뜻이야. 줄여서 성가족 성당. 이 성당엔 ‘탄생’, ‘수난’, ‘영광’이라고 이름 붙은 총 3개의 파사드(facade), 쉽게 말해 문이 있어.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돌아가셨고 어떻게 승천했는지에 대한 인생 풀 스토리, 한마디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 예수편인 거지. 지금까지 지어진 건 동쪽의 탄생과 서쪽의 수난 둘뿐이고, 남쪽의 영광 파사드는 아직 건축 중이야. --- p.33
방이 괜찮다 싶으면 화장실이 공사 중이고, 테라스 뷰는 참 멋진데 집 안에선 하수구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사기다!’ 할 일도 여기선 그냥 ‘맘에 안 들면 바이바이’ 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로 치부해버렸다. 어찌어찌 조건에 맞는 집을 찾고 나면 이번엔 최소 1년 이상 무조건 거주라는 없었던 조건이 붙기도 했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건, 같은 방을 노리는 경쟁자들이 10분 간격으로 끝없이 밀려온다는 사실이었다! --- p.74
어느 도시든 그 도시의 시그니처가 되는 거리가 있다. 서울엔 종로, 도쿄엔 시부야, 뉴욕엔 브로드웨이가 있다면, 바르셀로나의 시그니처 거리는 람블라스(Las Ramblas)다. 서울이 한강을 경계로 강남, 강북으로 나뉘듯 바르셀로나도 까딸루냐 광장을 가운데 두고 남쪽의 구시가지와 북쪽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까딸루냐 광장에서 시작해서 콜럼버스 동상이 서 있는 뽀르딸데라빠우 광장까지 내려가는 약 1.2km 길이의 가로수길 아니 (세로로 뻗었으니) 세로수길이 그길이다. 90p
데비가 급 자랑스러워졌다. 기타 잡고 센터에서 폼 나게 서 있는 저 친구가 바로 내 플랫메이트라고! 몇 날 며칠을 내복 차림으로 땀 삐질삐질 흘리며 연습한 도레미를 들어본 사람은 여기서 나밖에 없다고! 나만 입 다물고 무덤까지 갖고 가면 그 쇼킹한 비밀은 영원히 묻힐 거란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뿌듯했다. 자랑스러웠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목청껏 외쳐주었다“. 브라보 데비! 브라보!” --- p.131
누가 알랴 온몸을 밀착시켜 말단부터 감염된 태고의 희열을. 팔짱 끼고 관람하는 ‘공연’과, 온몸을 부대끼며 함께 뛰는 ‘접신’의 체험은 그 밀도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꽃할배도 이것까지는 몰랐을걸? 그때 이미 결심했다. 플라멩코, 너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 --- p.135
독일과의 4강전, 역사적인 ‘꿈★은 이루어진다’ 카드섹션의 첫 글자 ‘꿈’에서도 제일 앞 쌍기역 ‘ㄲ’ 그중에서도 첫 번째 ‘ㄱ’을 바로 내가 들었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옛 추억까지 자동 소환되는 들뜬 현장. 카드를 높이 치켜들고 마치 애국가를 부르듯 숭고한 마음으로 10만 홈 관중과 함께 응원가를 제창했다. “바르샤, 바르샤, 바~르샤 (Barca, Barca, Ba~rca)!” --- p.145
청년 가우디는 모태솔로였다. 여자를 몰랐다. 일밖에 몰랐다. 평생 딱 한 번, 서른두 살 때 조세파 모레우(Josefa Moreu)라는 유부녀한테 반해서 이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백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절망한 가우디는 종교를 도피처로 삼았다. 신에게 귀의할수록 다친 마음은 점점 더 닫혀갔다. 사교적이지 못한 그를 주위에선 퉁명스럽고 거만한 인간이라고 욕했다. 30세나 어린 새카만 후배 피카소한테선 “지옥에나 가라고 그래”라는 막말까지 들었다. 그의 따뜻한 심성을 알아준 건 몇 안 되는 친구들뿐이었다. 평생 후원자 유세비 구엘(Eusebi Guell)이 그중 한 명이었다. --- p.169
보통 스페인 여자는 세다고들 한다. 스페인 남자한테 들은 얘기니까 아마 맞을 거다. 그런데 그 ‘세다’라는 의미는 사귈 때 구속하거나 집착하거나 추궁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한 번 헤어지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관계를 청산하는 모습을 얘기한 거였다. 헤어지고도 친구로 잘 남는 나라인데도 그것과는 다른 얘기라 했다. 잘 이해는 안 됐지만, 애매한 미련을 남기는 일은 없다는 의미 같았다. --- p.238
난 지금도 자신한다. 바르셀로나의 그 어떤 베테랑 관광가이드도 인베이더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임을. 무슨 엘로드 들고 수맥 찾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요상한 타일 조각이나 찾으러 다니는 할 일 없는 오타쿠로 보지는 마시길. 그저 내겐 놈들을 알아봐줄 눈이 있었을 뿐이니까. --- p.252
축제와 행사의 차이점은 뭘까?‘행사’라는 단어에선 뭔가 위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짜여진 냄새가 나지만‘ 축제’는 사람들이 밑바닥부터 자발적으로 만든 흥의 냄새가 난다. 특별한 전문가나 기관의 주도가 아닌 동네 할머니도 꼬마도 함께 뛰어들 수 있는‘ 막 춤판’ 같은 것. 바르셀로나의 축제가 그랬다‘. 보여주기’보다‘ 스스로 하기’가 중요한, 일상에 밀접히 스며든 생활 축제들. --- p.266
콘수엘로는 항상 명랑했다. 주변엔 늘 친구들이 많았다. 칠레 친구들은 이름을 짧게 줄여서 애칭으로 부르는 걸 좋아했다. 멜라니는 멜리, 베로니카는 베로, 하는 식이었다. 내 이름을 발음하기가 어려웠던지 날 부를 땐 ‘치끼요’라고 했다. 스페인어로 소년을 뜻하는 치꼬(chico)를 귀엽게 부르는 말이었다. 나름 기분 좋아지는 호칭이었다.
--- p.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