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수명의 반을 살아온 지금, 남은 반이 걱정되어 하루가 피곤하다. 사진을 시작하고 요즘처럼 복잡한 마음과 공허함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사진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올렸다. 집과 일상, 사진과 일에서 멀어져 근본적인 마음을 흔들어 보고 싶다. 익숙한 일상에서 멀어져야 가능하므로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플로리다가 떠올랐다. 일 년 내내 따뜻한 기후와 완벽한 날씨, 여유로운 산책과 익숙한 바다를 찾을 수 있는 곳.
얼마나 떠날 수 있을지 기약도 하지 않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몰랐다. 그저 내가 ‘카메라를 두고 떠나는 일이 가능할지’만 궁금했다.
카메라를 두고 떠나는 날, 늘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져 어색하다. 꼭 지갑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총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 든다. 카메라가 없는데 혹시라도 눈앞에서 찍어야 될 장면을 볼 것 같아 불안하다. 플로리다, 포트로더데일(Fort Lauderdale)에 내리자마자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찾았다. ‘카메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감했다. 순간, 로밍도 하지 않아 바보가 된 아이폰에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곧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두고 떠나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카메라 한 대를 주머니에 넣고 온 셈이었다.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pp.6~15, 프롤로그 중에서
현대 비평의 스타인 롤랑 바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행 안내서를 보면 이상할 지경으로 지루하고 쓸데없는 것에만 관련된 어휘로 채워져 있다. 이를 테면 세관, 우편물, 호텔, 의사, 가격 등이다. 그렇다면 여행이란 무엇인가? 만남이다. 만남에 대한 어휘만이 가치가 있다.”
나는 ‘旅行’이라는 최면을 걸고 끝없이 달린다.
만남에 대한 어휘… 여행에서 만나는 것, ‘만남의 가치’로 채워지는 여행, 사람, 문화, 낯선 풍경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는 나. ---pp.16~17
원래 갈매기는 무척 강인하고 공격적인 새다. 인간 주변에 사는 새치곤 덩치도 큰 편에 속한다. 그리고 길들여졌다. 먹이 때문이다. 사람 주변에 가면 먹을 게 있다는 걸 알고는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사람 주변에 사는 갈매기는 국적을 떠나 다 그렇다. 남해 홍도는 사람의 출입을 차단해서 보호하고 있는 재갈매기의 집단 서식지다. 그 갈매기가 얼마나 강인한지 직접 보면 깜짝 놀란다. 여기 로더데일 갈매기도 덩치만 컸지, 해운대 갈매기와 똑같다. 패기도 없고 공격성도 없다. 사냥의 처절한 고독보단 눈치의 쉬운 맛을 즐긴다. 빵조각을 위해 눈앞에서 정지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사냥을 위해 가다듬은 멋진 능력을 겨우 빵조각을 위해 쓰고 있는 멍청한 갈매기를 보니,
어느새 패기는 꺾이고 쉬운 방법을 찾는 일에 길들여진 나를 보는 것 같다. ---pp.52~53
이런 노을을 본 적 있던가? 일순간 보라색으로 물들어버리는 이 광경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분석하려 애쓴다.
언젠가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어른이라서 '의심하고 분석하고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좌뇌가 아니라 우뇌를 쓰고 싶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짚어보니
좌뇌가 개입될수록 행복과는 멀어지는 듯하다.
보라색은 어려운 색이다.
종잡을 수 없는 기괴함이 섞여 있다.
우뇌가 꿈틀거린다.
"그냥 보고 즐겨! 이렇게 쉬운 것도 생각해야 되니?"
---pp.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