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 디지틀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인터넷신문인 아이뉴스24의 에디터로 재직하고 있다. 「뉴스 공론장으로서 블로그의 가능성 연구」란 논문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인터넷신문과 온라인 스토리텔링』『블로그 파워』『웹 2.0과 저널리즘 혁명』『위기를 기회로 바꾼 IBM 회의혁명』등의 저서가 있으며 『하이퍼텍스트 3.0』을 번역했다.
하버드대학 교정을 거닐던 폴 앨런은 우연히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1975년 1월호를 봤다. 당시 앨런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 잡지 1면에 큼지막하게 실려 있던 알테어 8800의 사진이었다. MITS가 만든 알테어 8800은 당시만 해도 혁명적인 마이크로컴퓨터로 통했던 제품이다. 당시 잡지에는 “지금까지 선보인 것들 중 가장 강력한 미니컴퓨터 프로젝트?400달러 이하 가격으로 설치할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서둘러 잡지를 구입한 폴 앨런은 그 길로 빌 게이츠에게 달려가 알테어 8800을 위한 컴퓨터 언어를 개발해야만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조숙한 컴퓨터 천재였던 둘은 이미 시애틀에 있는 레이크사이드 스쿨 재학 시절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해 본 경험이 있던 터였다. 폴 앨런이 이날 무심코 눈길을 줬던 ?파퓰러 일렉트로닉스?란 잡지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컴퓨터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거대한 움직임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 pp.9~10
IBM의 PC는 나오자마자 엄청난 돌풍을 몰고 오면서 순식간에 업계 최고로 부상했다. 덩달아 컴퓨터 사용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80년에만 해도 3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컴퓨터 사용 인구는 1983년에 이르러서는 290만 명에 육박했다. 가히 정보 혁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위세였다. 이런 과정에서 IBM은 기존 강자였던 애플, 탠디, 코모도어 등을 제치고 업계 표준으로 떠올랐다. PC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든 IBM 입장에선 이 무렵이 가장 즐거운 시기였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빌 게이츠에게도 큰 선물로 다가왔다. 특히 IBM과의 협상에 따라 DOS 프로그램에 대한 배포권을 확보해 놓고 있었던 터라 PC시장이 확대될수록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입도 덩달아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IBM 호환 PC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MS?도스는 모든 컴퓨터의 기본 운영체제로 자리 잡았다. 소프트웨어 하나만으로도 억만장자 대열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상 처음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자기가 만든 표준으로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빌 게이츠의 야심찬 비전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 pp. 30~31
꿈은 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특히 어릴 적부터 소중하게 키워 왔던 꿈은 평생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빌 게이츠에게 그 꿈은 바로 ‘책상마다, 집집마다 한 대씩 놓인 컴퓨터’라는 비전이었다. 빌 게이츠는 10대 때부터 저렴한 컴퓨터가 가져올 미래상에 대한 꿈을 키워 왔다. 물론 단순히 집집마다 컴퓨터 한 대씩 들여놓는 세상을 꿈꾼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놓여 있는 PC에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넣겠다는 꿈이었다. 실제로 그 꿈은 그가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들 때의 창업 이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꿈은 이후 빌 게이츠가 PC 혁명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도록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다. --- pp. 41~42
빌 게이츠는 그 뒤 자선 활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속도나 경쟁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6월 말을 끝으로 마이크로소프트 경영 활동에서 손을 떼면서 빌 게이츠는 ‘속도’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는 삶’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그동안 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던 빌 게이츠는 2008년 하반기부터는 순수한 자선사업가로 새롭게 변신했다. 그리고 그 변신은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그의 철학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심판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이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빌 게이츠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