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소설전문지 『동촌문학』으로 등단하여 계간 <한류문예>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창작집 『물살』『발기에 관한 마지막 질문』『무인시대에 생긴 일』『개밥』이 있고 장편소설『침묵의 노래』가 있다. 또한 시집 『내 마음의 거처』『파란가을하늘아래서는 그리움도 꿈이다』『뜨거운 바다』이 있다.
그러니 먹이가 우리 생애의 전부였겠지요. 좁다란 사육장 안에 갇혀있으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의 영역과 먹이를 확보하려고 피투성이로 싸우는 동족들. 굶주림에 지친 아귀마냥 처참한 다툼이 따로 없었습니다. 현실이 우리의 중심인 까닭에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일조차 사치일 뿐이지요. 마지못해 하루, 또 하루를 살아있다는 게 고통이었지만 그마저 주어진 삶이었습니다. --- 본문 「중음」중에서
남포등 불빛에 비친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옆얼굴은 부처님 같아 보였다. 가끔 희끗희끗한 머리를 들어 검정다리가 있는 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나는 훔쳐볼 수 있었다. 따사한 아침햇살이 우물가에 비출 때면 아버지는 식구들의 신발들을 지푸라기 수세미로 박박 닦았다. 그걸 말리려고 엎어 놓을 때도 있었지만 세워두면 신발뒤꿈치에는 금방 뽀얗게 물이 고였다. 나는 고무신짝을 들고 팔을 몇 바퀴씩이나 휘휘 돌려 마당에 뿌리며 물기를 털어냈다. 누런 흙이 묻었던 신발이 하얗게 변하는 경이로움은, 내가 막연히 느끼는 아버지의 체온과 같았다. --- 본문 「섣달 그믐밤」 중에서
무엇인가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뭇 정체를 알 수 없으나 내 속에 얼쩡거리며 요상하게 나를 흉내 내는 그림자가 슬며시 느낌으로 다가왔다. 심연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서 내가 손을 내밀거나 귀를 세우면, 이내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그것. 혹시 그 악마적인 것이, 내 전두엽을 온통 지배하여 나를 조종하며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 강퍅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모골이 송연하도록 노려보고 있을 미지의 존재.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파생된 유전의 형질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내가 그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하더라도 나는 다시 비틀거릴 것이다. 나를 감시하면서도 내버려두듯 힐금거리는 무채색 같은 고요한 느낌은, 희망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금방이라도 불쑥 위험으로 바뀔 그림자로 다가와 있다. 아주 애매모호하지만 혹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삭신에 소름이 돋도록 얼쩡거리는 뭔가가 분명히 있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