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시마호텔이요? 이번에 운용 손실이 있었던 곳 말입니까?” 한자와 나오키가 그렇게 물어보자 부부장인 사에구사 히로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이세시마호텔이야. 자네가 담당해줬으면 좋겠어.” “잠깐만요!” 한자와가 한 손을 들고 상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법인부는 뭐 하고요? 그쪽 담당이잖습니까?” “은행장님 명령이야.” “은행장님 명령이요?”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한자와는 무의식중에 다음 말을 집어삼켰다. (……)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하게. 실은 이야기는 이미 다 돼 있어. 담당자는…….” 그렇게 말하고 수첩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도키에다 조사역이야. 이따가 이쪽으로 오기로 했어.” “도키에다요?” “아는 사람인가?” “네, 동기입니다.” 도키에다는 한자와와 같이 거품 경제 시대에 입행한 사람으로, 최근에는 만난 적이 없지만 얼굴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인수인계는 이번 주 안으로 부탁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 사에구사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자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야. 자네 외에 적임자는 없어.” 부하직원에게 일을 떠넘길 때 상사들이 흔히 하는 말이었다. --- p.14~15
산업중앙은행에 합격했을 때,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넌 이제 평생 편하게 살 거야.” 그 말의 배경에 있던 사고방식은 옛 대장성의 호송선단 방식이고,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였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옛 금융시대의 상징인 대장성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해체되고, 당시 13개였던 도시은행은 현재 겨우 세 개의 메가뱅크로 흡수되었다. 평생 편하게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은행 건물을 나와 교바시의 주상복합 건물 3층에 있는 회사로 들어가면서 곤도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먹고살 걱정이 없다는 뜻일까? 그런 뜻이라면 물론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병에 걸려도 은행에서는 이렇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의 대가로 입행 당시에 가졌던 꿈과 희망, 그리고 자존심은 어딘가에 던져버려야 했다. 인생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먹고살 걱정은 없다’는 보증도 바야흐로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다. --- p.70~71
“한자와 차장님 눈에는 우리 회사가 어떻게 보입니까?” 유아사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이는 한자와와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아직 젊은 축에 속하지만 사장이라는 직책 탓인지 동작이나 말투에 위엄이 배어 있었다. “공격할 방법을 잃어버린 거대한 코끼리라고 할까요? 현상을 타개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죠. 유아사 사장님께서는 그걸 가지고 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한자와는 솔직하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유아사로부터 한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버럭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디어를 낸다고 해도 실적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지요. 그때까지 은행에서 지원해줄 수 있습니까?”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믿으실지 안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한자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유아사는 진의를 헤아리기 위해 한자와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한자와는 깨달았다. 유아사에게는 입에 발린 립서비스는 통하지 않는다. 통하는 것은 진심뿐이다. --- p.103~104
7월 첫째 주, 금융청 감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금융청 감사관인 구로사키 슌이치는 천박하고 역겨운 엘리트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 자리에 있는 행원을 무시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음 한쪽이 뒤틀려 있다는 것도 역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 금융청 감사를 실시할게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빛에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간교함이 배어 있었다. 분위기가 묘한 남자였다. 한자와는 처음에 권력을 등에 업은 오만한 공무원을 상상했다. 가령 국세국 사찰관 같은 패거리나 어두운 색 양복으로 몸을 감싼 도베르만 같은 녀석. 그런데 구로사키는 그런 자들과 달랐다. 밝은색 양복을 입고 행원들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허수아비 같기도 하고, 동안이라서 그런지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가 그대로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구로사키는 아침 일찍 도쿄중앙은행에 쳐들어오자마자 이례적인 명령을 내렸다. “회의를 할 테니까 융자부 책임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이세요.” 회의 시작 시간은 9시 반부터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러자 구로사키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에 거품을 물고 두 사람을 비난했다. “이봐요!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예요? 9시 반에 모이라고 한 말을 못 들었어요?”
도쿄중앙은행 도쿄 본부 영업 2부 차장으로 승진한 한자와 나오키. 도쿄 본부는 산업중앙은행과 도쿄제일은행이 합병된 여파로 은행 내 화합이 가장 큰 화두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각 라인이 행내 입지를 세우기 위한 치열한 파벌 싸움이 한창이다. 한자와는 부실 채권으로 분류될 위기에 처해 있는 이세시마호텔 재건 전략을 세우면서, 이 건이 도쿄제일은행파인 교바시 지점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대규모 부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청의 감사가 시작되고, 한자와는 이에 맞서기 위해 또다시 고군분투한다. 한편 한자와의 입행 동기 곤도는 은행 거래처인 다미야전기에 파견을 나간다. 은행 직원이 아닌 파견 회사의 직원으로 새롭게 시작해보려고 하지만, 사장과 직원들의 따돌림으로 움츠러든다. 그러나 한자와와 함께 교바시 지점의 갑질에 대응하면서 점차 자신감을 갖고, 진심을 다해 다미야전기의 경영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은행원으로서의 긍지를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미야전기가 숨기고 있는 비밀에 다가가면서, 그 끝에 한자와의 일과 접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가족을 위한 선택과 직업 윤리 사이에서 크게 갈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