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일반인의 시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표적인 문구들을 가려뽑고 해설을 덧붙여 전체적인 내용전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경전의 주요 가르침을 일독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때문에 본문에 앞서 ?법화경을 읽기 위하여?라는 개괄적인 해설의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의 흥기 등을 통해 『법화경』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그 주요사상을 개관한 것으로서,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들은 반드시 먼저 읽고 나서 본문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본래 『법화경』은 고대 인도인들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 일대 서사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의 눈에는 장대하고 찬란하게 서술하려 한 의도가 지나쳐 일견 황망하기도 하고 반복이 많아 지루하기도 합니다만, 본서를 통해서는 불교사상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의 가르침을 경쾌하게 읽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p.6~7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진리만이 중요하지 현실은 그저 반복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한 인도인들은 예로부터 역사기술에도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공통된 제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데,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된 부분이다. 다만 이 자리에서는 여러 문헌들을 종합하여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모아 석가모니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p.14~15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초기경전에서는 왕왕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진리는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고, 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가까이 이끌어 들이는 것이며, 현명한 이라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한다는 입장에서의 여실지견如實知見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세상에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진리는 영원한 것으로서 나는 그것을 스스로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고 사람들을 위해 열어 보이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그 진리를 당신도 깨달아서 알아냈듯이 제자들도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는 입장에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법문法門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문은 글자 그대로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란 의미로, 초기불교 이래 계속 써온 단어이다. 따라서 불교를 공부하려면 스스로 깨우쳐 알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초기불교에서는 무작정의 믿음을 요구하기보다 그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청정심淸淨心만을 요구했다.”---p.21~22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 원력願力으로 다시 정리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지혜와 자비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앞서 밝힌 대로 보살로서는 깨달음을 구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이 지상과제지만, 깨달음을 먼저 얻고 난 후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고,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에게는 원력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원력이란 ‘한없이 원하는 힘’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서원誓願이라고도 하고 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실천을 위한 맹세’라는 의미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허공계虛空界가 다하고 중생계衆生界가 다하며 중생의 업業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한다면 보살의 행원도 다하겠지만, 허공계 내지 번뇌가 다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의 행원도 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대승불교가 기도하고 있는 깊은 종교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p.49~50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신다. 사리불이여,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은 일대사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하는가?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고, 중생들을 부처님 지견의 도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신다.”
(해설) 그리고 마침내 부처님의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묘한 법에 관한 설법이 시작된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의 큰 인연 때문이니, 그 하나의 큰 인연이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청정함을 얻게 하려 함이고,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려 함이며,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 함이고, 부처님의 지견의 길에 들어가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시 말해 불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중생들을 부처님이 되게 하기 위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초기불교 이래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과를 얻고 해탈하여 윤회輪廻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대승불교의 보살들이 목표했던 것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 다른 말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이런 목적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하신다는 것이다.
---p.7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