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특강이나 외부 강연을 할 때면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선한 충격을 받고는 한다.《아침미술관》은 이처럼 미술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미술관을 방문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직장인들, 예술작품을 창의성이나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도구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예술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된 책이다. 1권은 1~6월, 2권은 7~12월 분으로, 매일 한 점의 작품을 감상하는 구성이지만 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손길이 가는 데로 자유롭게 책장을 펼쳐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단, 12개월의 특성을 살린 키워드를 선정하고 각각의 달에 맞는 작품을 골랐으니 해당 달에 다시 한 번 일독하면 책의 콘셉트를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서문 중에서
더 멀리 나는 법 박상희 「폴(장대) 점프」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폴(pole)에 몸을 실으면서 허공을 향해 힘껏 점프하네요. 선수가 점프하는 곳은 조용한 유적지입니다. 지평선에 고인돌이 보이거든요. 화가는 새처럼 창공을 날고 싶은 욕망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하고 싶은 인간적인 갈망을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모습을 빌려 표현한 것 같아요. 경기장이 아닌 대자연 속에서 점프하는 장면을 선택한 것은 최강의 라이벌은 선수 자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은 지평선을 경계로 화면을 2등분한 수평 구도입니다. 수평 구도의 화면에 활력과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듯 장대가 휘어지면서 포물선을 그리는 순간을 포착했고요. 죽음 혹은 영생을 상징하는 고인돌과 순간 점프하는 선수의 모습을 대비시킨 의도는 무엇일까요? 도전 의식과 승부욕을 부각시키는 한편 찰나적인 삶을 영원으로 승화시키는, 혹은 시공간을 초월해 비상하는 꿈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리처드 바크의 소설《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선창가를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된 여느 갈매기들과 달라요. 더 멀리 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습하는 특별한 갈매기입니다. 어머니가 “다른 갈매기들처럼 사는 것이 네게 왜 그토록 힘든 일이냐”고 물었을 때 조나단은 “내가 공중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알고 싶다”라고 대답해요. 조나단처럼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하루가 되세요.---0709 중에서
두려움은 욕망에 불을 지른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메두사의 머리」
호러 페인팅 세 번째는 루벤스 편입니다. 화가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페르세우스가 다이아몬드 칼로 괴물 메두사의 목을 절단한 후의 상황을 묘사했어요. 징그러운 뱀들이 똬리를 튼 메두사의 머리카락과 공포에 질린 두 눈, 잘린 목을 타고 흘러나온 피 웅덩이에서 새끼 뱀들이 번식하는 장면은 바라보기 역겨울 정도로 끔찍합니다. 신화에 따르면 절세 미녀였던 메두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열애에 빠져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성관계를 갖는 실수를 저질러요.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처녀로 살았을 만큼 결벽증이 심했던 아테나는 연인들의 성행위를 목격하자 신성한 공간을 더럽힌 메두사를 영원히 벌하기로 결심해요. 메두사가 두 번 다시 남자에게 꼬리를 칠 수 없도록 괴물로 만든 것도 부족해 페르세우스를 죽음의 사절로 보냅니다. 절세 미녀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꿈틀대는 뱀으로 변신한 메두사 신화는 루벤스의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했어요. 그림은 잔혹과 관능이 바로크 시대의 인기 주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철학자 M. 비엔느는 “나는 두려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긴장을 유발하고 긴장은 삶에 대한 욕구를 자극해 나태, 의욕상실 등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두려움을 느낄 때 ‘아, 내가 삶에 대한 애착이 많구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어요.---0820 중에서
가을걷이의 의미 김홍도 단원풍속화첩 중 「벼 타작」
한민족의 2대 명절인 추석이 있는 9월(혹은 10월)은 농민들의 손길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달입니다.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가 1년 농사의 결실인 추수라는 주제를 놓칠 리가 없지요. 그는 가을날 농부들이 마당에서 벼 타작하는 장면을 해학적으로 묘사했어요. 농부들은 곡식 단을 지게에 져 나르고, 볏단을 힘껏 들어 올려 곡식 알갱이를 털어내고, 볏단을 묶고, 바닥에 떨어진 곡식 한 톨까지도 남김없이 쓸어 담아요. 그런데 저 양반의 행동거지를 보세요. 긴 담뱃대를 물고 돗자리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다리를 꼰 채 힘겹게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감시하네요. 빈둥거리기가 무료했던지 돗자리 옆에 술병과 술잔도 가져다 놓았고요. 김홍도는 거드름을 피우는 양반과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을 대비시켜 빈부 격차를 날카롭게 지적헇니다. 그러나 그림의 분위기는 활력이 넘치고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즐겁게 비꼬는 김홍도 식 풍자 방식을 구사했거든요. 하긴 누구의 곳간을 채우든 그게 중요할까요? 가을걷이를 하는데다 풍년인데요.
이제민의 시〈가을단상〉입니다. “고추 말리는 아낙네의 손 /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얼굴 / 가을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다. // 긴긴 기다림으로 / 간절함으로 / 한 해의 풍요를 기도하던 일 // (……) // 가을 그림자 / 길게 늘어지면 / 한 해의 내 그림자도 / 편히 쉬겠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드리워진 해 그림자처럼 여러분의 하루도 편안하기를 기원합니다.---0925 중에서
인생의 가을이 오면 제임스 티솟 「10월」
티솟은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초상화가 중 하나이기도 해요. 그는 빅토리안 미녀들을 보석처럼 화려한 색채로 정교하게 그린 초상화로 부와 명성을 얻었거든요. 다음 그림을 보면 미녀의 화가로 알려진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답니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가 노란 단풍잎을 밟으면서 공원 속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네요. 화가는 드레스의 질감이나 단풍은 정밀 사진처럼, 몸동작은 스냅 사진인양 묘사했어요. 감상자가 그녀의 뒤를 따라 단풍이 물든 숲 속으로 걸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말이지요.
10월의 요정처럼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초상화의 모델은 화가의 연인 캐슬린 뉴턴입니다. 그녀는 폐결핵에 걸려 28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6년 동안 그의 애인이며 모델이 되었지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화가가 연인의 모습을 단풍처럼 아름답고도 애잔하게 표현한 것은 그녀의 때 이른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은 아닐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윤동주의 시에 나온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가을이 오면 단풍처럼 아름답게 삶을 물들였노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1002 중에서
고독과 대면하기 에드워드 호퍼 「간이 휴게소」
11월에는〈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로 알려진 안톤 슈나크의 “날아가는 한 마리 철새. 추수가 지난 뒤의 텅 빈 밭과 논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라는 글이 가슴에 젖어듭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호퍼는 존재에 대한 고독감을 그림에 표현했어요. 늦은 밤 휴게소에서 여자가 홀로 커피를 마시네요. 여자는 감상자의 눈길을 거부합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오직 자신뿐이거든요. 화가는 그녀가 고독하다는 것을 몇 가지 요소로 알려줍니다. 먼저 커다란 직사각형 유리창에 반사된 실내조명인데 차디찬 인공조명은 현대인들의 소외감을 나타내지요. 다음은 여자의 패션인데 그녀는 왼쪽 장갑만 끼었어요. 장갑을 한 짝만 낀 손, 세련된 옷차림, 짙은 화장은 고독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여자가 출입구 바로 옆 탁자에 앉은 것은 떠돌이 삶이라는 뜻이지요. 감상자는 그녀를 훔쳐보는 동안 깨닫게 되어요.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휴게소의 유일한 손님인 여자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지나가버린다, 아무도 붙잡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도시인들의 고독과 상실감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소유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집착합니다. 집착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단 하루만이라도 하루키 식의 감미로운 슬픔, 투명한 비애감을 느꼈으면 합니다.---1107 중에서
인류에게 보내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환희의 송가」 부분
베토벤 교향곡 9번은 12월 31일이면 가장 자주 연주되는 명곡입니다. 특히 독일 시인 실러의 시에 곡을 붙인 합창이 나오는 4악장은 송년 분위기에 딱 맞아 인기가 높습니다. 평화와 인류애를 감동적으로 전하는 명곡을 그림으로도 감상할 수 있어요. 클림트의〈베토벤 프리즈〉 벽화 삼부작 중 하나인데요, 화가는 1902년에 열린 제14회 분리파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어요. 전시관에는 베토벤에게 헌정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당시 유럽 예술가들은 베토벤을 음악의 신, 천재, 영웅으로 숭배했지요. 장미꽃이 만발한 천국의 정원에서 연인들이 포옹하면서 열정적으로 키스하네요. 두 사람을 결박했던 끈들은 풀어져 발목으로 흘러내리는데 끈은 본성을 억압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해요. 아름다운 여성 합창대가 연인들을 에워싸고 환희의 송가를 부릅니다. “예술은 우리를 순수한 기쁨, 행복, 사랑의 왕국으로 인도한다. (……) 천상의 천사들은 합창한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온 세상에 입맞춤을!”
클래식과 미술이 만나면 이처럼 감동은 곱절로 늘어나는가 봅니다. 이해인의 시〈12월의 엽서〉를 빌려 독자들에게 송년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 한뫅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 (……) /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 새 달력을 준비하며 / 조용히 말하렵니다 /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123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