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내가 프랑스 A1 고속도로 부근 어딘가에 있는 경찰서에 앉아 경찰에 한 진술이었다. 진실이었다. 온전한 진실이 아니었을 뿐.
--- p.13
“조심해, 핀.” 루비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루비의 말이 귓속에서 울린다. 조심하라니, 누구를? 루비한테 묻고 싶다. 레일라를? 아니면 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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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택제 때문에 반질반질한 인형을 손안에 꼭 쥐고 있자니 언제나처럼 힘겨운 마음속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갈망과 후회, 고독과 무한한 슬픔이 팽팽하게 맞선다. 물론 고마운 마음도 있다. 이 작은 목각 인형이 아니었다면 레일라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았을지 모르니까.
이 인형은 원래 레일라 것이었다.
--- p.26
낯빛이 창백해지니까 주근깨가 더 또렷해지더라. 그때였어, 내가 너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
--- p.32
“나한테 꼭 붙어 있어요!” 내가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보다 더 크게 외쳤지.
네 손이 내 손을 단단히 움켜잡았어. “걱정 마요, 안 떨어질 테니까!” 너도 큰 소리로 외쳤어.
네가 그렇게 영원히 내 곁에 꼭 붙어 있길 바랐는데.
--- p.34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다시는 자기가 나 때문에 무서워할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날 밤 레일라처럼. 나는 소리 없이 덧붙인다.
--- p.99
레일라가 거기 있어야 하기에, 레일라를 향한 내 마음을 닫아보려 아무리 노력해도, 엘런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한순간도 레일라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기에.
--- p.121
단어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듯 아른거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눈에 초점이 맞춰졌고, 편지를 읽는 동안, 내 세상 전체가, 내가 만든 나만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p.181
우리를 마음대로 휘어잡을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우리 둘을 이간질했다. 그게 바로 내가 아버지한테 유일하게 배운 점이었다. 이간질해서 이기는 것.
--- p.233
하지만 사랑은 자기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는 걸,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도 하게 만든다는 걸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 p.241
그토록 핀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다는 게 아직도 놀랍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핀이 망가지길 바란다. 그래야 그를 내가 원하는 대로 다시 조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246
5주 전, 담장 위에서 인형을 발견했을 때, 그때 엘런한테 솔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형과 이메일을 공유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엘런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었을 것이다.
--- p.276
그토록 핀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다는 게 아직도 놀랍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핀이 망가지길 바란다. 그래야 그를 내가 원하는 대로 다시 조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내 실종도 그를 그다지 망가뜨리지는 못했다.
--- p.246
그게 바로 내가 핀을 쉽사리 용서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을 모조리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딱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다.
--- p.246
그 작은 인형의 머리를 뭉개버리니 뭔가 만족스러웠다. 내 머리까지 개운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 머리도 뭉개버리면 어떨까, 그래서 나를 자꾸만 과거로 잡아당기는 목소리, 다를 수도 있었던 과거의 환영을 보여주며 나를 조롱하는 목소리를 날려 보내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 p.259
그놈에게 알려주지 마, 그놈에게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마. 목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어서 핀에게 실마리만 하나 주었다. 제발 그가 실마리를 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를 다시 데려가, 너무 늦기 전에.
--- p.284
“아직도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지, 그렇지?” 엘런이 묻는다.
갑자기 부글부글 울화가 끓어오른다. “전에도 물어봐서 그렇다고 말했을 텐데!”
“몇 주 전이었잖아.”
“그래서, 달라진 거 없잖아.”
“모든 게 달라졌지.”
--- p.290
예전에는 모르는 게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레일라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 레일라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레일라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것. 하지만 아는 것이 훨씬 더 최악이다. (…)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게 있다면, 바로 이거다. 레일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녀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한눈에 알아봤어야 했다는 것…….
--- p.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