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언급된 동서고금의 저자들, 수록된 내용
D. H. 로렌스, 쿤데라, 헤겔, 칸트, 토인비, 리슈통,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청즈, 스티에성, 소동파, 혜능, 장차오, 고염무, 쳰종수, 양스치우, 니체, 사르트르, 롤랑 바르트, 브레히트, 알퐁스 도데, 알렉스 헤일리, 헌팅턴, 인슌, 허스광, 숑스리, 데이비스, 체 게바라, 밀로반 질라스, 프레드릭 제임슨, 마르크스, 프랜시스 후쿠야마, L. 토마스, 푸코, D. 호프스태터, 아리프 딜릭, 백영서, 러셀, 데리다, 하버마스, 공자, 맹자, 베이컨, 동중서, 페르난두 페소아, 데스몬드 모리스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백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의 그런 애호는 하방下放 시절에 시작되었다. 하향하기 전 나는 몇몇 친구들과 폐쇄된 학교 도서관에 숨어들어 손에 잡히는 대로 책 몇 권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시골 장마철의 어두웠던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아름답던 언어의 세계를 나는 영원히 기억한다. 그런 언어로부터 오늘에 진입하면서, 나는 언어 역시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든 아니든, 모두 인간의 경험과 사유, 감정 속에 침전되어 뇌의 발육과 진화를 추동함으로써 인간관계를 조직하고 인성을 부여한다. … 조각조각 흩어진 복잡한 세계지도 속에서, 우리의 몸은 배반의 이기심을 분비한다. 오로지 진리의 소리, 저 멀리서 맑게 반짝이는 정신만이 국경을 넘고 피부색, 머리색, 생김새의 차이를 관류하여 인류 공통의 영혼을 향할 것이다. 영혼과 영혼이 모두 깨어 있다면.---세계
---중국은 종이와 활자인쇄를 최초로 발명한 나랍니다. 그래서 출판, 교육이 발달하고 독서인이 아주 많았죠. ‘사농공상’ 중 ‘사’는 유사儒士와 문사文士를 이릅니다. 유럽이나 일본의 군사귀족인 무사武士가 아니죠. 전국시대 독서인들은 ‘육예六藝’를 추구했는데, 그중 활쏘기와 말타기가 있었습니다. 문무겸비였는데, 그 점에서 유럽이나 일본 무사와 비슷합니다. 레이종하이 선생의 말처럼, 나중에 와서 ‘문약화’되었습니다. 몇십 년 일심으로 성현의 책만 읽었죠. 희곡에 나오는 백면서생들을 보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 외에는 하나같이 아가씨들과 눈 맞아 연애질만 하잖아요. 그 많은 독서인들이 다 과거를 보려고 하니 처음엔 황제가 기뻐했습니다. 천하의 인재가 다 우리 손안에 걸려들었구나, 하고요. 그런데 나중에 가니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그만한 편제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정원외員外’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죠.---역사:현재와 과거의 상호 자극---정이, 공자, 치엔무, 브로델 등을 읽는다
---질문_ 중국 문학계에는 항상 ‘노벨문학상’에 목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벨상 콤플렉스 같은 것이 번번히 신문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그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답변_그건 중국 문학계의 자신감의 결핍을 보여줍니다. 노벨상은 분명 많은 우수한 작가들을 고무해왔습니다. 하지만 과실도 있었죠. 이 상을 숭배하거나 저주하는 것, 모두 과민반응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상이 있으니 약간 흥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독서 에이전시나 작품추천으로 치면 되지요. 하지만 어떤 상도 올림픽 금메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은 체육이 아니에요. 금메달은 있을 수 없죠. 스웨덴은 중국의 성省 하나만 한 작은 나라입니다. 중국 문학을 포함하여 세계문학은 절대 이런 상에 의해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을 주는 기구의 명예가 바뀌겠지요. 그래서 수상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피곤하고, 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얼마 전 어느 사장님 말이 중국인이 주재하는 세계적 문학대상을 만들려고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디다. 상금을 노벨상보다 더 크게 하겠대요. 제가 관두라고 했습니다. 신중해야지, 고생을 사서 할 필요 없다고요.
---문학: 문체의 개방과 가까이보기
---듣자 하니 장따치엔(張大千,1901~1984)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 피카소를 찾아갔을 때, 피카소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파리에는 뭐 하러 왔나? 파리에 무슨 예술이 있다고. 예술은 자네들의 동양과 아프리카에 있다네……. 이런 것들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들이 주시했던 양쯔 강과 황허 양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금 이곳은 천지를 뒤엎을 듯한 개혁과 재건이 진행 중이다.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과 기술 일체를 서양으로부터 ‘빌려와’ 현대화된 생활을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문학의 뿌리_텐, 토인비를 읽는다
---서양에서 건너온 공업문명은 중국인의 눈에서 해태를 걷어냈다. 안빈낙도는 썩은 유가의 설교라며 조소와 냉소 속에 폐기되었다. 가난에 찌든 중국인들은 부를 이루는 데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발전벽’에 시달렸고,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두 함께 ‘발전’을 성지聖志로 삼았다. 그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사람들을 힘껏 설득했다. …이상하게도 행복의 총량이 늘수록 행복지수는 감소한다. 행복과 행복지수는 다르다. 20세기 1970년대, 어느 중국 청년이 봉황표 자전거로 행복할 수 있는 기간이 이년이었다면, 지금은 아마 두 달, 아니 이틀이면 끝날 것이다. ---가난하긴 쉬워도 부자되긴 어렵다---소동파를 읽는다
---중국어는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이 사용하는, 수천 년의 광대한 전적典籍을 자랑하는 언어이다. 일찍부터 굴원, 사마천, 이백, 소동파, 조설근, 루쉰이 미적 경지로 끌어올린 언어다. 그런데 이제 중국어가 중국인도 돌보지 않는 하등인의 표지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 세계---알퐁스 도데, 알렉스 헤일리, 헌팅턴을 읽는다
---우리에겐 오늘의 공자와 장자가 없고 오늘의 『이소』와 『단경』이 없다. 우리에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대학가가 있지만, 자연과학계의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가 없고 철학계의 칸트와 마르크스, 하이데거가 없으며, 문학계의 톨스토이, 카프카가 없고 예술계의 피카소와 베토벤이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학설을 잇고 발전시키고 나아가 당당하게 실천으로 연결시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조류에 영향력을 미친 시대의 문화거장이 없다. 동방의 문화강국을 논하면 그저 말을 얼버무릴 뿐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학생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해, 우리의 많은 학과는 지금껏 서양의 수혈로 명맥을 이어왔다.
--- 위와 동일
---이런 성공은 서양인의 지적 입맛을 키워준다. 그런데 이런 입맛은 더 많은 관성과 자극을 요구한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비굴하다가도 서양인 앞에만 가면 입에 브레이크가 고장났는지 메가폰을 향해 헛소리를 쏟아낸다. 서양에서 굴러먹은 지 오래여서 전문적인 하소연법을 알고도 남는다. 거기에 약간의 우아함도 곁들일 줄 안다. 이를테면 서양인이 좋아하는 불주佛珠를 걸거나 묘족苗族의 그림을 가지고 나온다. 여기서는 문혁 때 온 집안이 붙잡혀가 몰살당했다고 말했다가, 또 저기 가서는 골동품점에서 사온 수제꽃신을 품속에서 꺼내들고 할머니의 유물이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들은 서양인들이 고기와 맥주로 포식한 후의 럭비게임이나 오토바이 경주를 보듯 수제 꽃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충분한 중국 경험이 없는 그들이 진위를 변별할 수 없다는 것을. --- 위와 동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보면 캄푸치아(캄보디아의 구칭)를 원조하던 백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내분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영어를 알아듣는 프랑스 인들이 고집스레 영어를 거부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다중언어로 협상을 진행함으로써 영어 헤게모니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가의 익살만은 아니다.---위와 동일
---이 노란 금지선 앞에서 ‘국가’ 혹은 ‘국가의 쇠망’을 이해해보자. 이번에 나는 한국 서울의 어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했다. 대체로 노란 금지선을 순조롭게 넘었다. 회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찾아서’였다. 재미있게도, 주제는 ‘동아시아’인데 참석한 모두가 서양 음식을 먹고 서양식 호텔에서 묵었다. 이런 일상적인 광경은 대체로 딜릭 선생이 말한 ‘토착화된 전지구화’를 적절히 은유한다. 회의석상에서 적지 않은 훌륭한 발언들이 있었다. … 20세기 역사 속에서 중국 지식계는 ‘동서비교’를 습관적으로 ‘중서비교’라고 말해왔다. 대중화주의의 거대한 꼬리를 숨기기 어렵다. 이런 정황 속에서 백영서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
---국경의 이편과 저편---아리프 딜릭, 백영서, 러셀을 읽는다
---묵자와 그 추종자들은 대체로 우리 지청과 같았다. 들판의 잡초처럼, 거친 옷에 밧줄로 허리를 동여맸고 피부엔 살점이 허벅지엔 솜털이 없었다. 그뿐인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투성이였다. 날이면 날마다 산에서 땔감을 캐거나 밭에서 벼이삭을 줍는 그들에게 용모가 대수였겠나?
땀냄새 물씬 나는 곳에서 생활하면서 이 검은 사내는 많은 병서와 노동서를 썼고 역학, 광학, 기하학에 관한 체계적 지식들을 엮어냈다. 명실名實, 이동異同, 지조 등의 문제에 대한 논리분석 역시 한동안 대통이 끊겼지만 후세 명가名家의 원조가 되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실로 비범한 인물이었다.---묵자---묵자를 읽는다
---전자매체 기술은 이미 많은 신종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의 거대한 지역성이 약해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중국 문화는 영국 문화와 많이 달랐는데, 이제는 중국 아이든 영국 아이든 똑같은 옷을 입고, 중국 어머니든 영국 어머니든 똑같이 아이들이 종일 컴퓨터게임에 매달리는 걸 걱정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도 똑같고요. 동시에, 문화의 세대차이는 점점 증가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상용어를 못 알아듣고, 동생은 형이 좋아하는 음악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은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죠. 다시 말해, 전자문화의 전파력이 강하고 파급범위도 넓어서 공간의 벽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시간의 벽을 세웁니다. 기존의 문화연구가 ‘영국 문화’, ‘중국 문화’, ‘후난 문화’, ‘쟝수 문화’ 같은 공간 획분에 주의했다면, 이제는 ‘80년대 문화’, ‘90년대 문화’, ‘구九삼대 문화’, ‘신新삼대 문화’ 같은 데 주의해야 할 거예요. 사회과학원도 지금까지 ‘영국 연구소’, ‘프랑스 연구소’가 있었다면, 이제는 ‘80년대 연구소’, ‘90년대 연구소’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기호: 문화의 게릴라전인가, 문화의 유희인가---그람시,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읽는다
---저는 현대인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기는커녕 나날이 빈곤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졸업하면 대학을 가고 그리고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나가면서 평생 책이랑 컴퓨터랑 씨름합니다. 가장 최신 유행의 기어와 나사못, 아니면 기껏해야 지식확성기나 지식복사기가 될 뿐이죠. 대출 받아 집 사고 돈 벌어 차 사고 결혼해서 애도 낳고 싶어합니다. 인생궤적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죠. 지금 엘리트들의 성공한 생활이라는 게 이렇게 유형화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은 옛 고인처럼 ‘만 권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걸어’ 자유롭게 이 세계를 해석하기 어려워졌습니다.---위와 동일
---영어를 말하는 국가 중 부자나라가 많아요. 특히 미국은 구매력이 강해서 일당 백, 일당 만이죠. 그러니 정보산업 시장에서 매력이 있죠. 대량의 영어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셋째로, 영어는 그 운용범위가 확대되면서 민족과 문화를 초월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성이 약해지고 도구성은 증가했어요. 간단하게 배우기 쉽고 규범 활용도 쉬워서 인문위기, 경제발달의 시대에 아주 적합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영어가 있어요. 필리핀 영어, 뉴질랜드 영어, 인도 영어, 남아프리카 영어, 미국 흑인영어 등등, 서로 다 다릅니다. 영어는 그 최대 공약수를 취해, ‘월경적’ 영어가 되었죠. 이미 원래의 영어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영어의 소스를 빌린 준세계어죠. 영어의 간화簡化 버전이랄까요. 어떤 프랑스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에게 말하기를 ---영어가 어떻게 언업니까? 도구죠라고 했는데, 아마 그런 뜻인 것 같아요. 그런 극단적인 발언에야 동의하기 어렵지만, 문화로서의 영어는 도구로서의 영어와 분명 다릅니다. 그런 최대공약수 식의 영어, 그런 세계적·도구적 영어는 오랜 시간 동안 강세를 지킬 것이고, 나아가 약소언어들을 무참하게 궤멸할 겁니다. 리루이는 ‘영어제국주의’라는 말을 했는데 그런 수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언어: 도구성과 문화성이라는 양 날개
---일반적으로 소어종 문화는 쉽게 양극화됩니다. 쇄국을 하거나 소실되어 동화되거나입니다. 지금 영어가 소어종들을 하나씩 먹어가고 있죠. 하지만 대어종 문화는 규모가 방대하고 내부에 광활한 번역과 출판 공간이 있습니다. 쇄국하기도 쉽지 않고 동화도 잘 안 됩니다. 외래문화의 강력한 충격을 받아도 문화변천과 재생이라는 장구한 과정에서, 결국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또 나이기도 하고 남이기도 한 것으로 변하게 되죠. 이건 정상적인 문화의 진화입니다. 인류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좋은 일이지 나쁜 게 아닙니다. 인류문화는 상호교류와 다양성을 원합니다. 다양성은 교류의 전제이죠
------언어: 도구성과 문화성이라는 양 날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