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대단한 곳으로 도망갈까 싶었는데…그래, 생각한 곳이 고작 여깁니까?”
입가에 걸려 있는 짙은 비웃음에 세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했건만, 륜은 어디서 알아냈는지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선수를 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절망이 밀려왔다. 잘라 내도 잘라 내도 잘라 낼 수 없는, 베어도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억센 사슬이 그녀의 사지를 휘감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를 억압하는 사슬의 끝을 쥐고 있는 자는 륜이었다.
“…세희.”
진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그녀의 앞을 막아서듯 가려섰다. 그의 손이 허리에 차여 있는 검을 쥐었다. 굳어 있는 진휘의 표정에 륜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고귀하시고 고귀하신 자(紫)의 어르신! 온갖 미천한 것들 위에 군림하시는 하늘같으신 분! 그런 분께서 설마 이런 천하디 천한 적(赤)을 상대로 그 검을 뽑으실 요량이신지요?”
한마디 한마디에 독기가 뚝뚝 묻어 떨어지는 그 말에 세희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평소에도 입버릇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창백하도록 시린 만월 아래에 양 팔을 벌리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는 륜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세희는 너 같은 것에게 어울리는 이가 아니다.”
“적이 남의 아내를 탐하면 그것은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하는 대죄가 되고, 자가 남의 아내를 탐하면 그것은 불쌍한 여성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행동이 되는 것이 되는 겁니까?”
“진휘공…!!”
불현듯이 발해져 새까만 어둠을 가르는 은빛 궤적에 세희가 새된 소리를 올렸다.
까앙!
눈 깜짝할 새에 허리의 검을 빼어 들고 진휘가 륜의 검을 막아섰다. 륜의 검을 막아내는 진휘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가 알기로, 륜은 검에 능한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기습 같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이 솜씨는―
“명목상의, 얼간이 놀음 같은 관계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성희께서는 제 아내이십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제 아내를 다른 사내에게 뺏기는 얼간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건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