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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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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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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8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328쪽 | 486g | 153*224*30mm
ISBN13 9788995694435
ISBN10 8995694432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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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에
감사의 글 / Preface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보내는 글 / My fellow Koreans athletes, coaching staff and members of the National and Olympic teams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일
엄마 아빠 말을 안 들어서 벌 받은 거야!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읽다
소변을 볼 수 있으니 너는 행운아야
뉴욕으로 돌아와 깁스를 풀다
좌절된 올림픽의 꿈, 브로큰 트로피

눈물겨운 이민생활의 시작
1973년 7월 18일, 미지의 세계로 떠나다
퀸스의 얼떨떨한 아시안 꼬마
저를 벌 주려고 미국에 데려왔나요?
좋아, 너희들에게 보여주겠어!
처음 반한 일본 소녀
운명의 순간

문제아가 된 에스비
YMCA의 꼬마 청강생
어머니, 나의 엉뚱한 어머니
드디어, 주니어 체조선수가 되다
우리 가족의 새로운 보금자리, 뉴저지
체조, 그것은 내가 가야만 하는 길
나는 아버지를 닮지 않을 거야
슈퍼마켓의 4인조 권총강도 사건
너무나 기다렸던 말, 한국 대표가 되어볼래?

사지마비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이승복
휠체어야, 나의 발이 되거라
제발, 그만 나가주세요
내손으로 글씨를 쓰다
포르테, 포르테, 포르테시모…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 태극마크를 달 수 없어요”
러스크 박사의 ‘돌봐야 할 세상’
뉴욕 대학 의대생들과 친구가 되다
인형의 방으로 오세요

다시, 세상 속으로!
드디어 뉴저지 집으로!
집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애물
아직도 버리지 못한 미련
SAT 1,300점에의 도전!
승복, 너는 정말 특별한 학생이야!
1987년 4월 27일, 나는 다시 태어났다
도슨 트로트먼, 나의 또 다른 영웅
휠체어를 타고 한국으로 가다
의대에 가겠다고요? 당신은 장애인이잖아요

현실에 충실하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콜롬비아 대학에서의 새로운 출발
여기는 공기가 다르잖아!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한국문화
드디어 의대에 도전하다
합격, 그 폭발의 순간!

나의 영혼아, 잠잠히 길을 걸어라
다트머스 의대 입학식
새로운 시련
악몽의 해부학 공부
정상인 뺨치는 나의 운전솜씨
승복 리의 유명한 어머니
너의 이름은 에스비, Super Boy!
스포츠가 좋아
어머니의 무너진 육체
회한과 기쁨의 졸업식

사랑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꿈이 되고
닥터 리의 첫 출근날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가정의학이 가르쳐준 교훈
‘올해의 인턴’으로 선정되다

존스 홉킨스의 슈퍼맨 닥터 리
장애로 환자의 마음을 열다
나를 감동시키는 나의 환자들
한국인을 돕는 기쁨
나의 첫 번째 환자, 어머니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어머니와의 외출
응급실에 실려온 나의 어머니
대한민국의 씩씩한 청년, 이승복의 색시감을 찾습니다

영원한 한국인으로 남고 싶은 소망
KBS 〈인간극장〉 방영 후
해군사관학교에서 만난 한국 아이들
올림픽의 꿈은 계속된다
한국의 척수장애인들을 위하여
〈서편제〉가 가르쳐 준 한
모든 것은 ‘선택’에 달려 있다
남아 있는 나의 선택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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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이민생활 속에서 체조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승복 씨가 가족들과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여덟 살 때인 1973년이었다. 당시는 매년 2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미국 본토로 쏟아져 들어갔던 가족이민의 시대였다. 이승복 씨의 아버지는 경희대 약학대를 졸업한 후 약국을 운영하던 엘리트였지만, 늘 약국 생활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민을 가면 한국에서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초기 한인 이주자들이 많이 정착했던 뉴욕 퀸스 구역의 플러싱(Flushing)이란 곳으로, 흑인이 많고 다분히 소란스런 지역이었다. 그때부터 힘든 이민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민 온 지 몇 달 만에 부모님은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일을 나가셨고 그는 어린 동생들을 모두 공부시켜가며 돌봐야만 했다. 어쩌다 만나는 엄마에게 달려들어 안기기라도 하면 힘들다며 귀찮아 하셨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조금만 덜 바쁘고 덜 피곤하기를, 가족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웃으면서 저녁식사 할 수 있기만 바라였다. 그러려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고 조국 한국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늘 다니던 한인교회 옆에 있는 YMCA를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가게 됐다. 거기서는 그 또래 아이들이 수영복 같은 옷을 입고 마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운동들이었다. 몸을 비틀며 공중회전을 하는 아이, 링에 매달려 천천히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아이, 안장에서 하체를 쉼 없이 돌리고 비트는 아이, 새처럼 비행하여 착지하는 아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미국에 온 후로 부모님의 애정에 굶주리며, 놀림과 낮섦 속에 하루하루 옴츠러들던 그의 가슴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장면이었다. 체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체조야말로 그가 해야 할 일이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어느 날 몰래 따라하는 그의 모습이 코치 눈에 띄었다. 코치는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잔뜩 얼어 아직 돈이 없어서 등록을 못했지만 꼭 배울 거라고 말했다. 코치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나와서 체조를 배우라고 말했다. 드디어 무료 청강생 자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온통 체조에 빠져들었다.


촉망받는 운동선수에서 사지마비 장애인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의 기량은 향상되었다. 뉴욕 Zone 3의 시합에서 마루운동 부분 1, 2등을 했고 평행봉과 링에서도 상위성적을 냈는가 하면, 1979년 구역경기에서는 금메달을 땄고, 같은 해 마루운동 부분 뉴욕 스테이트 챔피언이 되었다. 그 후 코치의 권유로 그는 집을 떠나 펜실베이니아 주 앨런타운 체조훈련센터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하루 5시간의 맹훈련을 계속했고 집에도 자주 들리지 못했다. 곁에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챙겨주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고 속이 상했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현재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체조, 그것만이 어떤 고통을 치르든 그가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기량을 다져 나갔다. 1981년 여름, 10학년 때 전국연합챔피언십에 출전해 종합성적 3위를 기록, 그중 마루와 도마는 각각 1등과 2등을 차지하였다. 11학년 가을에는 국제친선 주니어대회에 참가해 종합성적 3위, 1982년 전미대회에서는 마루에서 금메달, 도마에서 금메달을 따서 종합순위 3위를 기록하였다. 코치들 사이에서는 서서히 미국 국가대표팀에 넣어보자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에겐 미국 성조기를 달고 마루에 설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오로지 한국 선수이기를 바랬다. 몇 년 후 그는 1983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게 되었다. 미시간대, UCLA,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템플대, 스탠포드 대, 웨스트포인트 군사학교 등 유명 체조팀을 운영하고 있는 거의 모든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 등 그의 미래는 창창했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손만 뻗으면 가능할 것 같은 강한 현실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코치가 미국에서 열리는 인터내셔널 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되면 1986년 아시안게임은 물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문제없이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한국대표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그의 얘기에 그는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체조에 대한 지나친 열정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꾸어놓았다. 1983년 7월 5일, 그는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오른 것이다. 그는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으로 땅을 박았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성공과 안락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밝은 미래가 그 찰라의 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C7-C8 종결선언을 받았다. 그것은 일곱 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으며, 평생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잘 쥘 수 없는 악력으로 살아야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야 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의사들의 종결선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꿈이 깨진 순간, 모든 희망은 일순간에 사라졌고 오직 분노만이 그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체조를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인생의 두 번째 금메달을 향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분노를 그 앞에 놓여진 현실, 재활훈련에 쏟아내었다. 희망이 에너지이듯 그의 분노 또한 에너지였다. 그는 재활훈련에 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그는 일찌감치 먼저 일어나 앉아서 조무사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그는 혼자서 병원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휠체어가 있음에 감사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바라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을 느끼기 전에 튼튼한 두 발이 되어준 휠체어를 타고 먼저 세상을 찾아 나갔다. 물리치료를 한지 4개월에 이르자, 그는 가능한 근육들을 거의 모두 쓸 수 있었다. C7-C8 환자 중에서 그처럼 재활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보았다며 의사들도 물리치료사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권의 의학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어느 날
조무사 한 명이 그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이라는 책이었다. 다른 어려운 의학서적들과는 달리 쉽게 쓰여져 있던 그 책을 읽으며 그는 자신에게 행해졌던 모든 고통스런 재활훈련이 하나하나 의미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의학의 많은 분야들이 육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반해, 재활의학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처, 생명의 양을 늘리는 문제, 그리고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까지 두루 관여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꿈을 잃어버리고 텅 비어버렸던 그의 가슴에 새로운 설렘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뉴욕대(NYU)를 목표로 잡았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불편한 손으로 아슬아슬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며 체조선수에 쏟던 정열을 고스란히 학업으로 돌렸다. 그리고 5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SAT에서 총점 1320점을 획득, 뉴욕대에 입학했다.
뉴욕대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았을 때 그는 친구들과 교수들, 가족들에게 메디컬 스쿨 진학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상인들에게도 힘든 의학공부가 장애인인 그에게 어려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당당히 콜럼비아대학에 입학해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버드 의대에 들어가 하버드 의대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되었다. 그는 도전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또다시 척수신경과를 공부하려고 하고 있다. 인생의 금메달을 향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조국애와 가족애가 사라진 시대에 ‘자랑스런 한국인’!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1등으로 살고 싶어요! 뭐든지 열심히, 1등으로.”이승복은 88서울올림픽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그의 가족들은 모두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국적조차 받지 않았을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고, 사고 후 사지마비가 된 것보다 어린 시절 그를 놀리던 미국 사람들과 부모님께 올림픽 메달을 드릴 수 없어 더 화가 났다고 말할 만큼 가족애 특히 부모에 대한 사랑과 효심이 두터웠다. 그가 체조를 선택하게 된 것도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밤낮없이 바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위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한국말을 잊어가는 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했고 이름을 부르는 동생들이‘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놀아주지조차 않았다. 지금도 Robert보다는 이승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그는 지난해 여름 아테네 올림픽 때도 한국체조 대표팀을 위한 전담의사를 자원했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그의 한국어 발음 또한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이제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그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잊고 있던 조국애과 가족애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고, 사람들과 환자들에게 신뢰와 믿음, 삶의 희망과 용기 그 이상을 불어넣어준다. 환자들에게는 주치의이자 고통을 이겨내는 디딤돌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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