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伯.10 子曰 好勇疾貧이 亂也요 人而不仁을 疾之已甚도 亂也라
태백.10 자왈 호용질빈 난야 인이불인 질지이심 난야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용맹을 좋아하면서 가난을 싫어하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게 되고, 인하지 못한 사람을 너무 미워하면 사회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용기라는 것은 칼과 같아서 필요한 것을 자르는 데 써야지 사람의 목을 베고 물건을 부수는 데 써서는 해악이 된다. 용기를 발휘하기 좋아하면서 가난을 싫어하면 자연히 도적질을 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따위의 반사회적인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남의 도덕적 결함을 증오하는 것이 정도를 지나치면 자기도 괴롭고 정의에 어긋나는 보복이나 징벌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 질서가 흔들리고 불안이 야기된다.
고홍명 : Confucius remarked, "A man of courage who hates to be poor will be sure to commit a crime. A man without moral character, if too much hated, will also be sure to commit a crime."
변영태 : The Master said, "Habitual recourse to bravado and resentment against poverty end up in disturbance; inordinate contempt for others’ failings, too, ends up in disturbance."
'好勇疾貧亂也'에서 '疾'은 '미워하다'이고 '貧'은 '가난', 그리고 '亂'은 '어지러울 란'인데, 행패를 부리고 사고를 내고 난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고홍명은 '용기 있는 사람이 가난하게 살기를 싫어하면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로, 변영태는 '습관적으로 허세를 부리면서 가난을 혐오하면 결국 소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로 옮겼다.
Legge는 'The man who is fond of daring and is dissatisfied with poverty, will proceed to insubordination(과감한 것을 좋아하면서 가난을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반항할 것이다)'로, Waley는 'One who is by nature daring and is suffering from poverty will not long be law-abiding(천성적으로 과감한데 가난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오래 준법하지 못할 것이다)'로 해석했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는 모두 이미 여러 번 나왔던 글자인데, 해석상에 큰 문제가 있다. '人而不仁'과 '疾之已甚'을 연결된 구절로 보느냐 각각 독립된 구절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은 매우 달라지는데, 각각 독립된 구절로 볼 때에는 '사람이 불인하고 (남을) 너무 심하게 미워하는 것이 사고다'의 뜻이 된다. 자구 해석으로는 충분히 타당한데 이렇게 볼 경우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싱겁다.
내가 본 영역자 중에서는 이 해석을 택한 사람이 없다. 나는 둘을 연결된 말로 보아서 '사람이 불인함(또는 불인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심한 (지나친) 것이 사고다'로 해석해 왔다. 변영태의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나치게 미워하는 사람도 소란을 일으키게 된다'는 이 범주의 해석이다.
그런데 고홍명은 '불인한 자가 지나치게 미움을 받으면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난'을 일으키는 주체를 '불인자를 심히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고 '심히 미움을 받는 불인자’로 본 것이다. 대부분의 영역자들 역시 같은 식으로 해석했다.
Legge는 'the man who is not virtuous, when you carry your dislike of him to an extreme, [will proceed to insubordination](불인한 사람을 [사람들이] 극도로 미워하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로, Ames는 'a person lacking in character who is overly despised will be a source of trouble(인격이 부족한 사람이 과도하게 경멸을 받으면 말썽의 근원이 된다)'로 해석했다. Waley는 'any men, save those that are truly good, if their sufferings are very great, will be likely to rebel(진정으로 인한 자 말고는 어떤 사람이든지 고통이 심하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로 새겼는데, 그러니까 '疾'을 '미워하다'로 해석하지 않고 '고통받다'로 해석한 것이다.
나는 가끔 '정의파'임을 내세우며 지극히 독선적인 사람을 보고 곤혹스러워질 때마다,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옳은 일이지만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 구절을 떠올렸었다. T. S. 엘리엇은 "after such understanding, what forgiveness?", 즉 어떤 사람의 심경이나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 일부러 용서'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도 정의감이 연민이나 관용보다 과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亂'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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