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일본인 친구와 한 조가 되어 도보로 3시간이나 걸리는 시골 외딴집을 방문해 그림액자를 팔았다. 다시 3시간이나 걸어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일본인 친구는 팀원들 중에서 판매 수칙을 가장 철저히 지키기 때문이었다. 내가 투덜대며 앞서가자 그가 쫓아와서 말했다. 「당신이 지금 힘들어하는 것은 돈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먼 길을 찾아온 것은 이 그림액자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하면 일 자체가 즐겁고 돈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p.19
독일어에 능통한 한국인 유학생에게 이런 말을 불러주며 독일어로 최대한 공손하게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1988년 서울에서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열립니다. ……” 과연 이 쪽지가 효과가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어서 곧바로 판매에 나섰다. 정성들여 만든 쪽지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잡상인 취급을 하던 독일인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식당이나 술집에 들어가서 주인에게 쪽지를 보이면 십중팔구는 물건을 팔도록 허락해 주었다. --- p.24
유학생 동료 한 명과 트리어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함부르크로 장사를 떠났다. 함부르크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워 꽤 많은 돈을 벌고 이튿날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려 트리어로 돌아오는 길에 트리어 15킬로미터 지점에서 깜빡 졸아 교통사고를 냈다. 뒤따르던 운전자가 신고해서 헬기까지 출동할 정도의 대형 교통사고였다. 피투성이가 된 동료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하느님, 제발 저 친구를 살려주세요.” ‘차라리 내가 죽을 걸… 역풍아, 제발 좀 멈추어다오!’ 라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 p.36
브라질 상파울루 출입국 관리 직원은 한국 영사관에서 관용 도장을 받아오면 입국시켜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때마침 상파울루 축제 기간이라 한국 영사관이 3일 동안 문을 열지 않으니, 공항 내에서 3일 동안 기다렸다가 관용 도장을 받던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칠레로 들어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사흘 뒤에 영사관에서 관인을 찍어준다는 보장이 없기에 결국 칠레로 들어가기로 했다. --- p.41
한국 상인들은 마주보고 있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 검문소에 각각 50달러씩 주고 출입국 도장만 받아서 산티아고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바꿔준 아르헨티나 돈을 달러로 환전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땅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아르헨티나 국경 검문소에 100달러를 더 상납하고 멘도사로 가서 미국 달러를 손에 쥐고 보니 환전상을 시작한지 2주 만에 2,500달러가 넘는 소득을 올렸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두 달 전, 칠레에 올 때 1만 달러를 갖고 왔는데, 한 달 반 동안 여행 등으로 실컷 쓴 돈을 단 2주 만에 복구한 셈이었다. --- p.50
편의점 점원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인적이 뜸한 새벽 2시경에 가게에 좀도둑이 들었다. 거대한 체구의 좀도둑이 가게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서 돈도 지불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한국적인 사고가 머릿속에 박혀있는 나는 도둑과 사투를 벌여 땅바닥에 넘어뜨렸다. 멱살을 잡아채는 순간 도둑이 무지막지하게 내 팔뚝을 물고 늘어졌다. 그 바람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가게 바닥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진열장이 파손된 가게는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 p.65
성인 예닐곱 명이 들어갈 수 있은 대형 냉장고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서 냉장고 문을 닫는 찰라 강도가 나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카운터에 아버지 혼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내 모습이 보이자 엉겁결에 권총을 발사한 것이었다. 강도가 쏜 총탄은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벽에 박혔다. 등골이 오싹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부자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금고에 있던 돈을 몽땅 털렸다. --- p.68
다음날 아침, 조지타운 병원에서 정밀진찰을 한 결과 의사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너무 걱정돼서 의사를 붙들고 그 병이 무슨 병인지 자세히 물어보았다. 의사는 21번 염색체 수가 한 개 더 많은 것이 원인인 선천성 정신박약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하필이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세탁소와 병원을 오가는 중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 p.75
어느 날,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대로 나는 미스터 조의 충고를 깜빡 잊고 한 손님이 맡긴 고급 블라우스의 어깨 부분을 줄여달라는 바느질감에 손을 대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청바지 기장 줄이는 솜씨로 블라우스 수선은 무리였기에 결국 옷을 망쳐서 300달러를 변상해야 했다. 청바지 기장 30번은 줄여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변상하고서야 미스터 조쟀 말이 이해가 되었다. --- p.86
한국이 부강해지고 갖고 오는 달러가 많아지면서 이민자들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초창기 이민자들에 비해 육체노동을 기피하게 된 것이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는 이민자들도 장시간 일에 매달려야 하는 그로서리(grocery: 식료품, 잡화점), 리커스토어(Liquor Store: 술도 함께 파는 동네 슈퍼), 세탁소, 델리(delicatessen: 가공육, 치즈, 샌드위치 등을 파는 점포) 등 초창기 이민자들이 생활 기반을 다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힘든 업종은 외면한다. 적게 벌더라도 편하게 살려는 경향이 두드려진다. --- p.101
환영행사가 성황리에 끝나자 참석자들은 이 총재와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호텔 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행사장 대여료와 식대 등이 적힌 청구서를 내밀었다. 부가세와 팁을 포함해 무려 69,566달러(약 8천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던 행사장은 황량했다. 참석자들이 이 총재와 기념사진만 찍고 썰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허탈했지만 텔레비전에 회사 광고한 셈 치자는 생각으로 행사비를 모두 지불했다. --- p.114
한동안 한인 타운을 전전하다가 미국 군대에 입대하면 시민권을 준다는 말만 믿고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세계 모든 국가의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기를 위시한 잠수함, 통신 장비 등 일체의 무기는 최첨단 과학 기술이 축적된 것이다. 이것은 곧 군대가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군대 생활 중에 기술을 익히면서 시민권을 얻었고, 군과 연계되어 있는 대학에서 못 배운 한을 풀었다. --- p.146
‘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처럼 미국에서도 한국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애착은 극성스러울 정도이다. 미국인들은 학교 공부를 충분한 학습으로 받아들이지만, 1등을 고집하는 한국 부모들의 불안감은 한국식 학원을 번창하게 만들었다. 한국인들로 인해 미국도 이제는 사교육비 지출이 만만치 않게 주변 여건을 만들어 가고 있다. 방과 후에 학원을 보내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인들뿐인 것 같다.
---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