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중요한 사고방식들, 공공시설, 대륙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등은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는 유럽 라틴 국가들에게 지울 수 없는 대단한 인상을 남겨주었고 신성로마제국으로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004쪽)
초기 로마사의 대부분이 이러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아주 다채롭고도 세세한 사항들, 굉장히 흥미로운 사건들, 그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들. 하나하나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면 지금껏 믿을 만하다고 증명된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021쪽)
티베르 강 유역의 공화국이 갖춘 정치적 질서를 “현존하는 최고의 제도”라 평했다. 왕권정치, 귀족정치 및 민주정치의 요소들이 그 안에 모두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기에 특히 더 그랬다. (028쪽)
초대 공화국 사람들은 돌연 레스푸블리카(Res publica)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조국의 번영(salus patriae)’만을 되새길 뿐이었다. (031쪽)
훗날 로마가 갖는 광적인 정복욕 및 군국화는 정복을 통해 얻는 쾌감, 욕망 혹은 야망과 같은 인간의 진부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로마의 건국은 하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건국 신화는 로마가 처음부터 국민 의회 등의 민주주의적 발판 역시 갖추고 있었음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040쪽)
모든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 피와 땀 그리고 눈물 없이는 어떠한 왕국도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053~054쪽)
포룸은 정치적인 기능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 신전, 관청, 회관 및 상점들이 모두 몰려 있는 이곳, 한가운데에서 종교 행사, 일상적인 상업 활동, 비공식 모임, 외교적 만남, 선거 운동 및 상당수의 음모들 등 모든 것들이 일어났다. (084쪽)
공동체인 레스푸블리카가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귀족들 간에 서로서로 맺은 친척 관계 덕분이었다. 더불어 귀족들 외의 시민들이 힘 있는 가문들과 맺은 사적인 연결들, 이른바 클리엔테스 관계들로 움직였다. (092쪽)
평민들은 말 그대로 싸움을 통해 정치 참여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들이 얻어낸 것은 대부분 로마군의 장군직이었다. (…) 하지만 최고 계급인 집정관은 어떠했는가? 귀족들은 가차 없이, 모든 술수를 다 부려가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냈다. (115쪽)
추정하건대 동판이나 목판에 새겨진 첫 세 조항은 민사소송법, 즉 집행과 관련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다음의 두 조항은 가족 및 상속과 관련된 경우들을, 다른 두 조항은 계약 및 이웃과의 이해관계에 관한 법규를, 또 다른 두 조항은 형법을, 그리고 열 번째 판은 경찰법을 다루고 있었다. 나머지 두 개의 판들에는 추가 설명들이 새겨졌다. (118쪽)
접시 닦이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현대판 아메리칸 드림을 노예들은 수백 년 동안 고분고분히 따랐다. (…) 요즘의 의미에서의 인권은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 단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었기에 노예들도 노예 제도 자체에 거의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자유로운 신분을 얻은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은 흔히 자신만의 노예를 부리는 것이었다. (167쪽)
스키피오 그룹을 (…) 이후 고대 학자들은 (…) 그리스를 본받아 교육 및 인애를 자기 안에서 받아들이는 ‘휴마니타스 로마나(Humanitas Romana)’의 발상지로 설명했다. 이러한 관념들에서 근대의 인도주의가 영감을 받게 되었다. (196~197쪽)
로마는 굉장히 듬성듬성하게 매듭지어진 권력의 그물을 자신들의 통치 구역에 던져두었다. 각 지방의 총독들이 그 매듭이다. (…) 로마 통치권의 비밀인 보이지 않는 인프라 체계가 훨씬 더 중요했다. 바로 좋은 인간관계들로 맺어진 세밀한 그물망이다. (205~207쪽)
대략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로마인들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여는 향연을 자신들의 재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럴 능력이 있다는 로마인에 한해서다. (246~247쪽)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로마의 건축 문화는 500년 이상 지속됐다. 이는 초기 로마 공화국 시절에 시작되었는데, 제일 처음으로 검증된 콘크리트 건축물은 기원전 3세기 때의 것이었다. 콘크리트 건축 문화가 절정을 이룬 때는 초기 황제 시대 때로, 콘크리트를 사용한 아치 공법이 점점 더 섬세해짐에 따라 건축 구조의 한계를 극복해나갔다. (267~268쪽)
키케로가 이해했을 그 라틴어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였고 서양에서는 성경에서부터 성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텍스트들이 라틴어로 통용되었기에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라틴어는 완강하게 버텨나갈 수 있었다. (…) 로마의, 교회의, 그리고 학자들의 언어는 하나의 유산처럼 남겨지게 되었다. (274~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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