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이 근대화라는 목표를 어느 정도나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그 뒤로 한국이 경제, 스포츠, 과학, 기술 등의 분야에서 세계 10위권에 들게 된 것에 대해 현재 많은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한국이 그렇게 되는 데는 박정희 정권 시대에 시작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이 토대가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민의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거둔 ‘성공’은 한국과 한국인에게 중대한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것은 헌법 위반인데 가장 상위의 국가규범인 헌법을 어긴 집권세력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자체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피돼야 할 것인데, 박정희 정권의 ‘성공’은 이런 사고방식을 합리화하는 역사적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p.5 중에서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진압을 거부함에 따라 그린과 매그루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한국의 야전군을 동원해 쿠데타 진압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17일 아침 용산의 미8군 사령부에서 참모회의를 열었다. 의제는 ‘한국군 쿠데타 사태에 대해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취해야 할 조치’였다. 이 참모회의는 “쿠데타는 전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일부 군인들의 비합법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한국의 야전군 중 일부 병력과 미국의 1개 기갑대대를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p.70 중에서
민주당 정권이 시민과 학생들이 궐기하고 많은 피를 흘린 덕분에 집권하게 된 정권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민주당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성명 하나만 냈을 뿐 그 뒤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방관자로 있었다). 부정선거는 민주헌정을 파괴하는 행위이고 군사쿠데타도 불법이다. 그런데 국민이 부정선거에 대해 피를 흘리며 항거한 덕분에 집권한 정치집단이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마치 수배된 범죄자들처럼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제2공화국 정부, 즉 민주당 정권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국헌수호 노력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반역죄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법의 심판은 물론 없었다.---p. 81 중에서
야당의 만성적인 파쟁을 오랫동안 지켜본 박정희는 조선왕조에서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던 무리와 당시의 야당을 동일시했다. 그가 보기에 야당은 경멸과 탄압의 대상이었지 존중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미 1972년 5월 중순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유신 선포를 준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후락은 ‘풍년사업’이라는 암호명을 사용하면서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중앙정보부의 안가에 3명의 법률전문가를 데려다 놓고 이 작업을 진행하게 했다.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매주 청와대에 넘겨져 박정희,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 등 3인에 의해 검토됐다. 유신체제의 틀은 10월 초에 완성됐다. ----p. 213 중에서
1979년 6월 30일 한국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서방 7개국 경제정상회담에 참석한 다음 귀로에 6월 29일 한국을 방문했다. 이튿날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겉보기와 달리 파국으로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45분간에 걸쳐 한국의 안보상황을 설명하면서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카터 대통령은 지루한 ‘안보강연’을 듣다가 참지 못하고 배석한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그가 더 길게 계속하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부 철수시키겠다고 하라”는 내용의 메모를 건네기도 했다. ---p.272 중에서
김영삼에 대한 여권의 무리한 국회 제명 조치는 야당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김영삼의 연고지인 부산과 마산 지역의 민심도 자극해 격렬한 항의시위 사태를 유발했다. 김영삼 제명안이 변칙 통과된 직후부터 술렁거리던 부산에서 10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고, 시위는 곧 마산으로도 번졌다. 당시 부산과 마산창원 지역은 그렇지 않아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만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p.315 중에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은 우발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그 경위는 매우 복잡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궁정동의 총성이 울리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자주국방’을 내건 박정희 정권과 미국 정부의 갈등도 10·26 사건의 주요 배경요인 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