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사라지자 세계는 일그러진다. 세계는 작은 한 점으로 쪼그라들고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하고 세계는 한쪽 면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흐름의 방향을 잃고. 세계는 모든 시간대의 그물에 걸려 사방으로 마구 튀어오른다.
문장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문단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모든 시간이 동시에 출몰한다.
나는 오직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건너뛴다.
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흘러간다.
---「테 포케레케레」중에서
화면 속에는 배꼽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배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배꼽이 사라지자 그는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배꼽으로 숨을 쉰 적도, 배꼽으로 감정을 느낀 적도, 더더구나 배꼽으로 어떤 논리적인 생각을 해온 것도 아니었는데. 배꼽을 잃자 그는 모든 걸 잃었다는, 어쩌면 이대로 완전히, 정말 영원히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려웠다.
그는 두려웠고, 두려워서 외로웠다.
---「오늘」중에서
나는 이 도시에 남아 어느 날 몬트리올에서 온다. 어느 날은 모스크바에서, 쿠사다시에서, 탄자니아에서 온다. 어느 날은 암스테르담의 거리를 쏘다니고, 한쪽으로 기운 건물들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강물에 빠진다. 깊은 수심의 말로. 나는 어느 날 로마에서 온다. 어느 날은 웁살라에서, 볼리비아에서, 세인트루이스에서 온다. 어느 날은 히말라야의 산속을 헤매고, 눈밭에서 길을 잃고, 고산증에 시달린다. 시달리다, 시달리다, 시들시들 시들어간다.
---「아」중에서
과거와 현재가, 과거와 미래가, 미래와 현재가 뒤섞여. 끝이 없었다. 끝이 없어. 끝이 없을 것이었다. 말로의 말로. 언어는 무성이라. 말로는 무한 증식한다. 말로는 자가 증식한다. 말로는 모든 말로를 빨아들인다. 말로는 모든 말로를 포함한다.
---「아」중에서
한 단어로 내뱉어진 감정이란 미묘한 감각의 비늘들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살점은 뭉그러진 썩은 생선의 토막 난 몸뚱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문장은 눈앞에 인물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오르게 했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을, 만져지지 않는 고통을 피부로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지독한 냄새조차 풍기지 않았다. 떨림의 미묘한 차이를, 슬픔의 전혀 다른 농도를, 불안의 다양한 색채들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때로 그림을 그렸고, 다섯에게 비슷한 느낌의 음악을 들려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손짓과 발짓을 동원했다. [......] 그것은 강렬할 수도 명확할 수도 없었다. 절제 없이 과장되거나 미묘하게 어긋나 있을 문장의 발성. 발화된 고통이 실재의 고통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가. 나는 생각했다.
---「아」중에서
인간만이 갖고 있는 능력?
읽기, 쓰기.
산수의 능력이나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능력.
미래를 예측하고 타인의 사고를 상상하는 능력.
유머나 웃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일으킨다. 지독하게. 쓰러뜨린다.
---「홀」중에서
낯선 글자들이 보인다. 보인다는 착각. 제는 제가 보고 있는 것들이 모두 보인다는 착각 때문에, 보인다는 착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는 착각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는 착각. 보이지 않는다는 착각.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착각. 볼 수 있다는 착각. 제가 한참 여러 가지 착각 속을, 어떤 생각 속을 헤매고 있을 때.
---「홀」중에서
갑자기. 왜, 없이는. 왜 없이.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까. 왜 없이. 왜를 앓지 않고.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커서 블링크cursor blink」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