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오빠가 충무에서 돈을 부쳐온다. 나의 큰오빠. 그는 마치 나를 돌봐주려고 이 세상에 온 사람처럼 편지에 쓰고 있다. 이 돈으로 방세 내고 돈을 너무 아끼지 말고 날이 더우니까 참외도 사다 깎아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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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감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여기야, 라고 말하던 큰오빠의 목소리가 그때처럼 내귀로 흘러든다. 거기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한, 우리들의 외딴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게보였다. 구멍가게나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육교 위또한 늘 사람으로 번잡했었건만,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열일곱의 나, 컨베이어 위에서 창에게 어떤 기약을 하든 학교에가는 일은, 하계숙, 그녀들과 만나러가는 일은 나에게 사람을 배반하게하고, 동시에 수치심으로 그를 외면하게 해서, 오로지 외사촌의 발짝을 따라 외딴방으로 기어들게한다. 시골에서 자연이 상처였지만 도시에선 사람이 상처였다는 게 내가 만난 도시의 첫인상이다. 자연에 금지구역이 많았듯이 도시엔 사람 사이에 금지구역이 많았다. 우리를 업수이 여기는 사람, 다가가기가 겁나는 사람, 만나면 독이 되는 사람... 그러나 그리운 사람..몸의 기옥력은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기다. 마음보다 정직해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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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살림? 시골을 생각해본다. 하긴 시골 우리집 근처에 그토록 가는 허리를 가진 여잔 없다. 매끄러운 손가락과 윤기나는 머릿결과 검고 큰 눈망울을 가진 여자도.
돌아온 오빠에게 엄마는 말한다.
'너는 우리집 장손 아니냐. 그 허리로 밥이나 한끼 해내겄니?'
'밥 잘해요.'
외사촌이 킥 웃는다.
'밥만 해가지고 되간?'
엄마는 여자가 놓고 간 선물상자를 뜯어보지도 않는다. 큰오빠가 펴보라고 하니 저만큼 밀쳐놓아버린다.
'좋은 여자에요.'
큰오빠 말이라면 버스보고 기차라 해도 믿던 엄마가 요번엔 끄떡도 않는다.
'니가 객지에 나와서 외로워서 만난 사람이라 정이 깊은가보지마는 안 되야, 니가 둘째만 같어두 내가 두고나 보겄는디 너는 큰애 아니냐. 그 처녀 우리집에 들였다간 내가 평생 약수발하게 생겼다! 그 처년 절대로 안 되니께는 그리 알어.'
--- p.11
아버지는 파와 마늘과 고춧가루와 깨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민든 붉은 양념간장에 길쭉하게 썰어진 돼지고기를 담갔다가 꺼내서 석쇠에 구워준다. 둘째오빠는 사관생도가 되었고 셋째오빠는 전주에서 하숙중이다. 여동생과 나와 남동생은 아버지가 석쇠 위에 구워주는 양념간장이 묻은 돼지고기를 제비새끼들처럼 받아먹는다. 아버지는 내게 내일은 자장면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내가 괜찮아요, 하자 아버지는 얼굴이 쑥 내렸는데, 하신다.
내가 십육 년 후에 만난 그는 모를 것이다. 그가 내 부엌에서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을 때, 내가 그때의 아버지를 떠올렸다는 것을. 그는 내 냉장고에서 신김치를 꺼내 도마 위에서 잘게잘게 썬 다음, 달궈진 프라이팬을 버터로 적셨다. 그는 쇠고기 썰어놓은게 이만큼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면서 손가랄 두 개를 모았다. 내가 냉동실에서 고기를 꺼내주며 그의 등뒤에서 피식피식 웃자, 그는 고기를 프라이팬에 볶다 말고 왜 웃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그냥요, 행복해서요.
--- p.53-p.54
십 년 후...... 나는 전설처럼 그 며칠 후의 일들을 느닷없이 떠올렸다,고. 무슨 일인가로 우연히 그 전철역을 지나가는데 통증이...... 날쌘 통증이 전철보다 먼저 앞질러갔다,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남자는 문을 부쉈다,고. 냄새때문에, 기다림 때문에
--- p.226
시골에선 자연이 상처였지만 도시에선 사람이 상처였다는 게 내가 만난 도시의 첫인상이다. 자연에 금지구역이 많았듯이 도시엔 사람 사이에 금지구역이 많았다. 우리를 업수이 여기는 사람, 다가가기가 겁나는 사람, 만나면 독이 되는 사람…그러나 그리운 사람.
--- p.107
봄과 여름동안 내게서 문장은 떠나고 그녀의 목소리만 내 가슴에 물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너는 우리들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네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 하는 건 아니니?'
'넌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더라'
편안한 잠을 자고 깬 후면 어김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물이 되어 천장에서부터 내 이마로 똑똑똑 떨어져내렸다. 너.는.우.리.들.얘.기.를.쓰.지.않.더.구.나.네.게.그.런.시.절.이.있.었.다.는.걸.부.끄.러.워.하.는.건.아.니.니.넌.우.리.들.하.고.다.른.삶.을.살.고.있.는.것.같.더.라.
--- p.44-45
'너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하지 않더구나'
밤이 찾아온 검푸른 숲에서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백로는 하늘에서 쏟아진 하얀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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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딴방을 내 마음 속에 오래 묵혀 두었던 것은 내 안에 외딴 방이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만은 아니었다. 외려 언제부턴가 외딴 방은 나의 그리운 공간으로 내안에서 숨쉬기 시작했다. 그곳에 갇혀버린 그녀만 없었다면 나는 좀더 일찍 그때의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을 것이나 내 그리움 속의 그곳엔 그녀가 썩고 있었다.
--- 작가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