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은 뼈에 사무칠 정도의 심각한 정신 장애를 일으킨다. 저자는 중독이 우리의 내면에 숨어 있는 갈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생긴 잘못된 행동이라고 지적하며, 그 모든 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망각이라는 순환 속에서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독의 순환, 즉 불행의 악순환이며, 이 사회가 이러한 악순환을 통해 계속해서 중독자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독의 예로 비만과 거식 장애를 들며, 이 장애들 역시 인간의 깊은 정신 장애에서 비롯되며, 대개 거식 장애는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아기 때 먹지 않으려고 떼를 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억지로 먹으면서 느꼈던 분노와 시달림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상반된 모습이지만, 배불리 먹는 행동과 굶는 행동은 어린아이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최초의 자유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년기 시절에 세워 놓은 자신 인생의 각본을 분석했고, 유년 및 청소년 시절에 내면화되어 버린 명령들이 마력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있는 마력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주문을 하고 있다. "너는 그것을 해내지 못해!", "그 일은 하지 마, 너는 너무 머리가 나빠서 그것을 하지 못해", "맨 뒷자리에 앉아". 한편으로 이러한 메시지들은 마치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이 채찍질을 하듯이 우리들에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성장하길 원한다면 유년 시절에 형성된 마력의 메시지를 해독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삶의 심리적인 압박감 뒤에는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이 두려움은 정체성을 심어 주는 자아보다 앞서 있어서 자아의 각 부분들을 억압하도록 부추긴다.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면서 점점 힘이 빠지는 단조로운 일과로부터 한 번이라도 벗어난다면 '내 안'에 잠재된 욕망을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은 재능이나 자유, 호기심, 용기, 성욕, 모험 등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며,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자아에게 찌르는 듯한 아픔의 상처를 남긴다. 죽음은 바로 내가 죽더라도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삶은 이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단지 심장이 멎고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세상에 온정을 베풀며 인간답게 살았다면, 죽은 뒤에도 우리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불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며, 이는 곧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랑만이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자연에서 평범한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인생이 짧고 긴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성을 다하여 삶에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왔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인생이 단지 얼렁뚱땅 살다가 지나가 버리는 것에 불과한지를 판단하는 요소로 죽음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문명은 개인의 본질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바로 그 본질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어린 왕자이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어린 왕자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했을 때 죽음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삶은 장미의 빨간 색깔처럼 사랑으로 뜨겁게 타오를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모든 사랑은 살아 있는 동안 위협을 받는다. 우리의 미성숙함과 연약함, 신분상 어울리지 않는 결혼의 시작, 혹은 교제의 기간 중 생긴 마찰로 인해 이별하는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저자는 위기를 맞이한 부부의 심리 치료 과정 및 의미와 치료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며, '대화는 산소와 같다. 때문에 침묵은 곧 부부관계의 끝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의 중요 요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오해의 근원이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일은 힘들다.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의 행동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성도 깃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사회처럼 항상 개선의 여지를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집처럼 쉽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기본적인 감정으로,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 마티아스 융은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을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출산과 동시에 아이와 엄마 사이에도 이미 엄청난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면 아들은 아빠를, 딸은 엄마를 시기 질투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시작으로 해서 유치원에 적응하기까지 느껴야 하는 두려움,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각종 질병과의 싸움, 체벌에 대한 두려움, 열등감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부터 계속 따라다니면서 유아기 발달 장애를 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들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평온한 두려움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그 의미를 잃는다. 어디 두려움뿐이겠는가. 어른들은 대체로 무엇이든지 떨쳐버리고 잊어버리려고 한다. 특히 '강인한 남성들'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성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이런 어른들의 성향을 '시멘트로 막힌 영혼', '영혼의 아주 미세한 부분마저 닫혀 버렸음을 보여주는 두려움', '어린 시절의 욕구인 동시에 근본적인 그리움의 억압'이라고 표현했다.
내 안에 숨어 있고 내 위에 자리잡고 있는 권력 중독자들은 위험한 존재이다. 그런 만큼 권력욕에 이끌리게 된다면, 공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기보다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하게 될 것이다. 만약 권력 중독자들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양한 선물 공세로 나를 유혹할지도 모를 일이다. 권력자들은 이렇게 아주 보잘것없는 힘으로 우리를 유혹해 왔다. 그래서 '무의미한 악'(Hanna Arendt)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내 안의 권력욕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을 두려움과 부주의, 어리석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아주 옛날부터 언급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이다. 정치, 방송 그리고 소비 산업 속에서 우리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 권력자들이 여론을 조성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