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하는 버릇이 하나 있다. 여행하는 곳과 관련 있는 예술가와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다. 시, 소설, 그림, 조각, 음악 등 우리가 걸작이나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을 한껏 감상하고 여행지로 떠나면, 단지 눈에 보이는 그 공간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까지 여행할 수 있다. 마치 카페 센트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프로이트, 폴가, 츠바이크, 로스가 한자리에 모여 열을 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 p.5, 「시작하며」중에서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이름부터 ‘오래된vecchio 다리’인 이 다리는 1345년에 지어져 7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모습 그대로 도시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이 다리에는 몇 가지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다리가 연인의 명소가 될 수 있었던 일, 바로 피렌체와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평생 연모했던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장소가 이 다리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 지금도 이 다리를 찾는 연인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자물쇠를 걸어 다리에 매달거나 아르노강에 던진다고 한다.
--- p.18, 「1장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을 알려면 '작은 술통'에 주목하라고?」중에서
화려한 왕족과 귀족을 대신해 빈의 주인공이 된 것은 수많은 천재와 예술가였다.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표현주의의 시조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이 세기말의 빈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세기말 불꽃처럼 등장한 이들의 주요 무대는 어디였을까? 바로 살롱과 카페다. 빈이라는 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피라는 단어와 무척 밀접하게 느껴진다. 빈의 카페를 누비고 다녔던 수필가 알프레트 폴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카페란 혼자이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동시에 옆자리에 벗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처럼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살롱과 카페는 자유롭게 작품을 구상하고,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설파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 p.53-54, 「2장 ‘빈의 카사노바’는 의외로 순정파였다?」중에서
1787년 어느 날, 그의 집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서른한 살의 모차르트는 갓 열일곱 살이 된 소년에게 반해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이를 주목하십시오. 곧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둘의 관계는 베토벤의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고작 한 달 만에 끝나고 만다. 베토벤이 다시 빈을 찾은 것은 모차르트가 죽은 지 1년 뒤인 1793년의 일이다.
하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관한 극적인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모차르트의 전기 작가 오토 얀의 일방적 주장 외에 둘의 만남을 증명할 증거나 증언이 없기도 하거니와, 당시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 작곡에 열중하느라 무명 소년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여서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 p.77-78, 「3장 소금의 도시, 음악 천재를 팔아먹다?」중에서
「별」과 같은 순수한 소설을 감성적인 문체로 담아낸 소설가는 왠지 예민하고 섬세할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다혈질인 사람 역시 자기감정을 충실하게 담아낸 섬세한 문장을 잘 구사한다. 실제로 도데는 섬세한 감성을 지니긴 했지만, 동시에 프로방스 출신다운 정열적인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달리 그는 결투를 몹시 즐겼다. 아내를 비방하는 신문기자와 결투를 벌인 적도 있고, 자신이 아카데미 회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비판적인 기사를 쓴 기자와도 결투를 벌이고는 했다.
--- p.154-155, 「7장 최고의 순애보 작품을 쓴 작가가 사실은 다혈질?」중에서
마흔의 나이에 『데카메론』을 완성한 보카치오는 집필 활동을 이어간다. 1359년에는 밀라노에서 아홉 살 연상인 페트라르카와 만나 친교를 맺게 되는데, 이들의 인연으로 인류는 큰 선물을 얻게 된다. 말년에 신앙에 몰두한 나머지 비종교적인 작품을 모두 불태우려고 했던 보카치오에게 페트라르카는 세속 학문과 기독교 신앙은 별개이기에 굳이 작품을 태울 필요가 없다고 만류한 것이다. 이들의 친교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데, 1374년 페트라르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보카치오가 그 뒤를 따른다.
--- p.239, 「10장 ‘가장 인간적인 희곡’이 불타 없어질 뻔한 사연은?」중에서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고 있을 무렵, 예순 중반이 된 노년의 카사노바가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모차르트에게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며, 돈 조반니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부도덕하고 문란한 주인공 돈 조반니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를 쓰던 모차르트마저 카사노바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카사노바보다는 돈 조반니가 훨씬 낫겠다.”
--- p.241-242, 「11장 카사노바가 모차르트를 찾아가 '오디션'을 봤다고?」중에서
존 르 카레는 가명을 쓰는 스파이의 특성상 실명으로 책을 출판할 수 없었고, 상관이 책을 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가명으로 내더라도 인세를 받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는 고민 끝에 이런 방법을 썼다. 은행에 입금된 인세를 바로 찾지 않고, 예금액이 일정 액수에 도달하면 연락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가 되자, 마침내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전화를 받은 이후 그는 기분 좋게 사표를 던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로망을 실현한 인물이라 하겠다.
--- p.268-269, 「13장 전업 스파이가 문단의 ‘비틀스’가 된 사연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