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현실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현실 감각이란 뭐지?
사람들은 현실 감각과 꿈꾸는 것을 반비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두 가지로 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구.
현실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꿈꾸면 되는 거야.
꿈만 꾸고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음악을 하고 싶어? 그런데 돈이 없어? 그럼 돈을 벌면서 음악을 해.
잠을 반으로 줄여, 밥그릇을 반으로 줄여.
못 줄여? 못 줄이는 사람이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이야.
요즘 세상이라면 더욱 꿈을 갖는 게 가장 현실적인 건데 왜 놓아두고 있지.
지금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인데 왜 놓치려고 하지.
귀찮아서?
왜 요즘 사람들은 귀차니즘을 무슨 예술가 병인 냥 달고 다니는 거야?
하나도 안 멋있다 뭐. ”
“꿈 없이 어떻게 살아요.
내가 깊은 절망 속에서 꽁꽁 숨어버렸을 때도
내게 씨-익 웃으며 손 내밀어 준 것은 못나고 어리고 작은 내 꿈이었는데.
녀석은 의리가 강해서 그렇게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변함없이 기다려주었는데.
배고파도 조금 참자, 이런 게 현실이지요.
배고픈 게 뭐 어때서,
나이가 뭐 어때서.
녀석을 어떻게 지켜야할지 제대로 알고 몸을 움직이는 게
현실 감각이 있는 거예요.
집이 가난해서 나이가 많아서 꿈을 버리는 게,
누구 때문에 내가 양보하는 게,
그런 게 현실 감각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겁먹지 말아요, 기운 내요, 일어나요.
다시 시작해요.” --- 프롤로그 중에서
내 청춘에게 묻는다.
터럭까지 전율하는 독서 체험이 언제였던가,
보고 싶음으로 심장이 터질 듯 한 달음박질을 한 게 언제였던가,
맨발로 뛰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빈 거리에서 마주앉아 노래불러본 적이 언제였던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고
동터오는 창가에 서서 몸서리 친 적이 언제였던가.
내 청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삶이 점점 간소해지고, 생략되어지고, 덤덤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초라한 평화가 싫어서, 비겁한 안주가 부끄러워서,
내가 얻은 자유가 +에서 -로 전환되려는 찰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
어지러운 새 길 위에서 조금 멋쩍게 손을 흔든다. --- p.12
지금 너의 시계가 한없이 느리다면
너는 아무것에도 뜨겁지 않다는 이야기다.
무언가가 소중해질 때
가만히 보라, 의미 없던 시간들이 어떻게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지,
그저 흘러가기만 하던 시간이 어떻게 고여 마음의 회오리를 일으키는지. --- p.26
정확히 말하자면 잊혀지는 것이 제일 두렵다.
세월의 모든 순간들이 축적되지 않고 투과되어 버리는 것, 아무 색도 없는 것, 그래서 쉽게 잊혀지는 것. 추억에게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내가 나에게조차 열광 받지 못해 잊혀지고 마는 것.
자신이 스스로를 잊어 더는 무언가로 남기 어려워지는, 그런 두려움. --- p.56
하릴 없이 길가에 앉아 타국의 낯선 풍경들을 보고 있을 때,
생면부지의 어린 아이들과 뛰어놀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에게 마음을 낚인 채 어울려있을 때,
가끔은 불안해졌다.
이렇게 달리는 시간에서 비껴나 있어도 되는 걸까.
남들과 함께 달리며 거머쥐어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가면 얼마나 많이 뒤쳐져있을까.
종종 남은 여정을 세어보기도 하고
돌아가서 할 일을 부랴부랴 적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수연은 말했다.
네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여기 길 위에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떠나온 곳에서 아직도
이 길을 놓치며 살고 있는 거라고. --- p.30
생각해보면 자주 부딪히는 사람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다 그 사람의 소소한 모습을 의외의 낯선 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얼마 전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 외출을 하고 돌아와
툇마루에서 낮잠이 든 엄마를 보았다.
무방비 상태의 엄마. 그때만은 어린 딸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한 얼굴.
무심코 돌아서려다가 마루 밖으로 삐죽 나온 엄마의 발을 보았다.
거친 발. 굳은 살이 켜켜이 붙은 뒤꿈치.
칭얼대는 나를 업고 밤새 골목을 돌아다니던 발.
새벽 일을 나가던 발.
이삿짐을 끌던 발.
좀 더 깎으려고 발품을 팔며 시장을 다니던 발.
시간을 보내려 산을 오르던 발.
엄마가 지나온 길이 쩍쩍 갈라진 주름살처럼 갈래갈래 나있는 발.
피로를 잊고 달게 자는 여인을 보니 그 발이 생각났다.
일상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숨길 수 없는 속내처럼 생이 여과 없이 들어있는 발.
어머니의 발을 들여다본 적이 있어?
돌아가면 그 발을 오래 들여다보고
발에 난 길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수고한 생을 주물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198
여행의 절정,
가장 지치고 외롭고 아득할 때, 가장 잠을 설치고 가장 침묵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점을 통과하면 담아둔 말들을 외치고 싶어진다.
소리 높여 울컥.
그럴 때 부를 수 있는 이름 하나 있었으면.
엄마, 하고 다섯 번 부르면 누구나 다 눈물이 난다는 것처럼,
간절하게 그립고 애틋한 이름 하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밤이라도 맞을라치면
모두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 모든 그리움을 무마시킬,
아니 응집시킬 수 있는, 강력한 하나.
그것이 없어서 나는 외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간절한 것 극진한 것이 없어서 내 이름을 꺼내 불러보니
오랫동안 만져주지 않은 애인처럼 내 이름이 외롭고 안쓰러웠다.
너무 지치고 외롭고 아득할 때
그럴 때일수록 자신을 방치해두지 말고 스스로를 도닥여주었으면 한다.
자기 이름을 부르고, 괜찮느냐고 물어봐주었으면.
---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