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서울여고, 용산고, 서울 북공고, 영등포여고, 서울공고, 여의도고에서 3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으며, 소설가로 80년대를 주름잡았던 하이틴로맨스 문화를 주도하며 〈학창보고서(영화화)〉 〈스타탄생〉 〈통일절〉 등 총 27권의 책을 출간했다. 또한, 방송작가로도 활동, KBS MBC EBS 등 각종 방송사에서 3,000여 회 출연과 원고지로 약 13만 매의 방송 원고를 집필했으며, 이외에도 82년 MBC 대학가요제 금상 〈윷놀이〉를 비롯하여 80여 곡을 작사하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했다. 최근에는 18대 대통령선거를 예측한 가상 소설 〈안철수 대통령의 꿈〉을 출간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본인의 상상으로 써내려갔던 소설 〈통일절〉에 등장했던 주인공과 실재 인물인 한한국 세계평화작가가 너무나 닮아있어, 깜짝 놀라 한한국 작가에게 관심을 두게 됐다. 이후 그를 글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 금세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한한국 작가의 작품세계와 방대한 활동상을 세세히 옮기는 일은 몹시 힘든 일이었지만, 한한국 작가의 적극적인 도움과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널리 알리겠다는 목표의식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한한국 세계평화작가가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작품을 연이어 창작해, 더 멀리 더 널리 평화를 전하기를 응원한다.
2002년에 시작된 이 작업은 200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그간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몇 년을 하루 몇 시간씩만 자면서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제일 먼저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여보, 당신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요.” 아내의 비명에 놀라 무릎을 보니 이게 웬일인가, 무릎 아래 두툼하게 깔아 놓았던 수건 위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앗, 하마터면 작품을 버릴 뻔했잖아!” 그 순간에도 한한국은 무릎의 상처보다 작품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몇 년째 작업해 온 작품이 핏물로 얼룩진다면 그보다 더한 큰일이 없다. 그가 그려 나가고 있는 한글 세계평화지도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작은 붓글씨라, 엎드린 채로 무릎을 굽혀야만 쓸 수 있다.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인 동시에 세계와 한국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 수천 번 수만 번 엎드려 기원하고 있는 셈이다. 한한국은 이런 자세와 정신으로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가면서 20년 넘게 자신의 작품들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p.28
“김 명필, 물통 좀 주세요.” 서예학원의 강사로 겨우 밥을 빌어먹던 그 시절에, 그가 동료인 김 강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들은 아직 세상이 알아주는 명필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미래를 믿었기에 명필이란 호칭을 쓰고 있었다. “한 명필! 왜, 아침부터 입안이 사막인가?” “요즘 학실(확실)히 세상이 바뀌는 것 같은데, 글씨도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하지 않겠나?” 한창 유행하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의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내며 한한국이 말했다. “그럼 한 명필이 직접 한글을 세계하(세계화)하는 게 어때요?” 김 강사도 한한국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김 강사의 이런 조언은 그를 더욱 고민에 빠뜨렸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의 한 서예작가로서 그는 다름 아닌 아름다운 글씨를 통해, 우리나라의 평화와 화합과 통일을 위해 무언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작업을 해내고 싶었다.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군대에서도 모필병으로 복무했던 한한국이었다. 그러나 제대 후 지금까지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수강생들에게 글씨 시범을 보이다가도 엉뚱한 글자를 괴발개발 그리곤 했다.---p.46
한한국은 2008년 뉴욕 한국문화원 ‘세계평화 단독특별전’에 이어 2009년 또다시 큰일을 해내게 된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장장 4년에 걸쳐 완성한 초대작 〈중국 평화지도〉를 위시한 60여 점의 작품으로, 북경 주중한국문화원 ‘중국 평화지도 특별전’을 가진 것이다. “드디어 이번엔 뉴욕도 모자라서 중국까지 가는 거예요?”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도 염치없는 일을 많이 한 그로서는 아내의 얼굴조차 바로 볼 수 없었다. 애써 미안함을 감추며 농담조로 그가 대답했다. “그래도 중국은 거리가 가까워 비행기 값이 적게 들테니 그나마 다행이잖소. 미국만큼 행사비가 많이 들진 않을 거요.” 작품에 쓰이는 한지 값만 해도 몇 백, 몇 천인데다 거기에 전시회 비용과 수억 원에 이르는 작품에 대한 엄청난 보험료까지. 얼핏 따져만 봐도 상상을 초월한 액수가 된다. 그런데도 매번 자신을 지지해 주고 군소리 없이 따라와 주는 아내가 아닌가. 천군만마가 따로 없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예정된 날짜에 맞춰 작품을 북경으로 공수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과는 달리 행사를 준비하는 데 까다로운 절차가 많았다. 북경공항에 작품들이 막 내려졌을 때였다. 갑자기 중국공안이 들이닥쳐 검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한국에서 중국 대사관의 검열을 받았는데 또다시 검열이라니 속이 끓어올랐다.---p.83
이사 가서 며칠이나 됐을까, 하루는 2층에 사는 사람이 내려와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 혹시 뭐 하시는 분이신지요?” “저는 한글로 우리나라와 세계의 평화와 화합을 염원하는 지도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붓글씨로 십자가나 상징적인 작품을 만들지요.” “아, 그러세요? 어찌 된 일인지 선생님이 이사를 오신 뒤부터 제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어서요.” “설마요?” “혹시 작품을 구경할 수 있을는지요?” “네, 그건 어렵지 않지만……. 그러는 선생님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 명함을 건네받으니 한국수맥학회 이사라고 쓰여 있었다. 한한국이 그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그 동안에 완성한 십자가 작품을 보여주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바로 선생님 작품에서 나온 기(氣)가 너무 세서 제가 잠을 못 이룬 것 같군요. 한번 기 테스트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ㄱ자 모양의 ‘엘로드’란 기구를 꺼내든 수맥학회 이사가 십자가의 기(氣)를 테스트하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