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혁명 당시 한 집단이 일부일처제에 반대했는데, 랜터파가 바로 그들이었다.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인 존 로빈스는 “제자들에게 아내와 남편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본인의 아내를 바꾸었다.” 로렌스 클라크슨은 이것을 완전한 성의 자유에 대한 이론으로 정립했고, 곧이어 아비에셀 코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일처제 자체를 공격하면서 “진절머리 나는 가족의 의무를 버리시오” 하고 썼다. 클라크슨에게 간통은 기도와 다를 바 없었는데, 왜냐하면 둘 다 인간의 내면적 접근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실로 간통을 포함한 모든 것이 순수하다”고 강조했다.---p.27
국민방위대원들, 여성들과 아이들, 작업복 입은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위에서 죽게 될 방어 시설을 만들었다. 팡테옹 광장에서는 긴 스카프와 붉은 리본을 단 여성들과 ‘출발의 노래’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아이들이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클리쉬 가의 블랑슈 광장에서는 1백20명의 여성 부대가 전설적인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화요일에 그들은 격렬하게 그 바리케이드를 지켰지만, 바리케이드가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18구의 동부에서는, 1848년 리옹 봉기에서 한 구실로 이미 ‘바리케이드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지역 클럽 회원이었던 조세핀 쿠르투아가 두도빌 가와 스테팡송 가의 길모퉁이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을 돕기 위해 빈 나무통을 징발하고 있었다. 쿠르투아는 탄약을 나눠 주었고 어린 딸을 보내 싸우는 사람들에게 탄약을 전달했다. 에디스 토머스는 코뮌 기간의 여성을 다룬 책에서, 바리케이드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훗날 체포된 이와 비슷한 다른 많은 인물들의 목록을 작성했다.---p.75
야로슬라프 공장의 1895년 ‘4월 폭동’은 여성 직조공들의 도움과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성 노동자들은 1894~1896년에 산발적으로 벌어진 경제 파업에서 동지들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1896년 여름, 방직 노동자들의 역사적 파업이 일어났을 때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들과 혼연일체가 돼 파업에 동참했다.
천대받고 소심하며 권리를 갖지 못했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투쟁과 파업의 순간에 갑자기 성장해 주체로서 우뚝 서는 법을 배운다. 노동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여성 노동자는 노동력 판매자로서뿐 아니라 여성·아내·어머니·주부로서 자신의 해방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p.156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대담하게 경계선으로 다가가 총을 움켜잡고 간청하거나 거의 명령하다시피 말한다. “총검을 내리고 우리에게 동참하시오.” 군인들은 흥분하고 부끄러워하며, 불안한 눈길을 주고받고 동요한다. 누군가 먼저 마음을 먹는다. 그러면 죄를 진 것 같이 병사들은 전진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총검을 치켜들고 투항한다. 경계선이 뚫리고 기쁨에 넘치는 “만세!” 소리가 공기를 뒤흔든다. 병사들은 포위된다. 어디서나 논쟁, 질책, 호소가 벌어진다. 혁명은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p.181
혁명 6주 뒤 교회법 대신 민사혼이 실시됐고, 1년도 안 돼 적자와 ‘서자’의 완전한 권리 평등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완전한 권리 평등을 토대로 한 혼인법이 제정됐다. 1917년 12월 19일 법령으로 이혼이 아주 간단해졌다. 서로 합의한 경우 즉시 이혼할 수 있었다. 배우자 중 어느 한쪽이 요구를 할 경우에는 간단한 법정 신문을 거쳤다. 아무런 조건이나 논쟁도, 증거나 증인도, 그리고 성가신 공식 추천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듯 소비에트 러시아는 세계에서 완전한 이혼의 자유가 보장된 유일한 국가가 됐다. 결혼한 부부의 이름에 관해서는 1918년 10월 17일 법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결혼한 사람들은 공동의 성을 사용한다. …… 혼인신고할 때 남편(신랑) 성이나 부인(신부) 성, 또는 그 둘을 합친 성을 쓸지를 선택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아내 나타샤 세도바의 성을 사용했고, 아들들도 나타샤의 성을 물려받았다.---p.240~241
심지어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생각하는 여성해방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구성원들조차 개인적 자유의 전제조건으로서 집단적 향상보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의 자본주의 비판 능력을 칭찬하면서도, 그것이 그다지 긍정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 줬다. 왜냐하면 개인주의 때문에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소심한 우울증의 발작”으로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부르주아적 이상을 분리해 내고자 한다. 즉, 그들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빼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여성해방운동의 구호에 요약돼 있다. 이것은 정치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것을 재규정하며, 정치적 변화를 목적으로 한 집단행동을 부정한다.
여성운동에서 지배적인 주장, 예를 들면 저메인 그리어의 ‘침실의 혁명’ 같은 것은 여성이 스스로 억압적인 가부장적 태도에서 해방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태도가 아니라 사회 조건, 자본주의라는 실재하는 힘,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다. 그리고 남성들과 아이들은 물론이고 여성들 역시 이러한 것들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p.331~332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과거에 노동계급 여성들은 가정 밖에서 일하기를 열망했지만 남편들의 반대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제2차세계대전 이래 기혼 여성을 포함한 여성들이 대규모 ― 농업 노동이 초창기 공장으로 흡수되던 것에 필적하는 규모 ― 로 고용시장에 편입되면서 완전히 파탄이 났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한 세기 동안,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서 사실상 모든 기혼 여성을 가정에 매어 두는 가족을 방어하려는 남녀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대한 요소였다. 반면, 이제는 여성 노동자들이 가정 밖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약화된 ‘가족임금’이 여성들의 투쟁에서 중요한 요소가 됐다.
페미니스트들은 19세기 ‘가족임금’의 등장을 잘못 설명하고, 오늘날 모든 여성을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가정주부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노동계급 여성들은 다른 무엇보다 임금노동자다. 유급 고용은 노동계급 여성이 힘과 자신감을 획득해 여성해방을 쟁취하는 열쇠다.
---p.348-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