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신문 방송 대학원을 수료했다. 대한항공 시스템부에서 근무를 하던 중, 1989년 캐나다 회사의 스카우트를 받아 캐나다로 건너갔다. 이후 캐나다, 호주, 콜롬비아에서 항공사 컴퓨터 시스템 분석가로 근무하다가 2004년 귀국한 이후에는 로컬 프로듀서 및 영화 제작 쪽으로 커리어를 바꿨다. 2010년, 몇 년 간 기획해오던 저예산 장편영화 ‘마티나’의 제작에 착수하여 2011년 5월에 완성하였고, 현재 2번째 장편 영화를 기획 중이다.
회사의 바쁜 업무로 인해 대학원 논문 제출은 포기했다. 회사 내 팀원들과 유대감을 쌓으며 진행시킨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을 때 성취감을 맛보았고 우리가 개발한 시스템이 현업에 쓰여질 때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일로 인해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음 프로젝트가 있기까지는 정시 퇴근하고 휴식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일단 프로젝트가 시작 되면 짧은 데드라인(목표 완료 날짜)에 끝내기 위해 야근이 잦았고 주말에도 근무해야 했기에 내 시간 갖기가 힘들었다. 나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갖고 싶었다. 그러던 중, 당시 캐나다의 두 항공사인 에어 캐나다와 커네디언 에어라인이 공동 투자 하여 설립한 시스템 회사 ‘제미나이(Gemini)’로부터 1988년 잡 오퍼(job offer :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에는 온라인 리얼타임 분야의 항공사 시스템(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과 관리 유지를 할 수 있는 경력 있는 전문 인력이 세계적으로 부족하였다. ---p.12
1994년 9월 27일(한국 날짜 9월 28일). 회사 사무실에서 한국에서 걸려온 작은 매형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고 했다. 머리를 무엇으로 맞은 듯 머릿 속이 하얗게 느껴지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계속 전화번호가 적혀있던 수첩을 넘기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갈 비행기 예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있었지만 정신이 아득해 5분 이상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어머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회사에 휴가를 신청했다. 회사에서는 어머니 장례에 참석하라고 직계가족 사망 때 나오는 휴가 일수보다 많은, 주말을 합쳐 2주간의 휴가를 내주었다. 다음 날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관속에 평안한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작은누나는 “엄마가 평화롭게 잠자는 것처럼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슬픔과 며칠동안 잠을 못 잔 몽롱함 속에서 9월 30일 어머니의 장례를 지냈다. 큰누나의 주선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대세를 받은 어머니는 안성 천주교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까지 렌트카를 빌려 천주교 공원 묘지에 있는 어머니의 산소를 거의 매일 혼자 찾아갔다. 이제는 무덤밖에는 어머니를 찾아갈 곳이 없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머니의 모습도, 음성도 없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으로 눈시울만 붉힐 뿐이었다. 향이 다 탈 때까지 어머니 옆에 있었다. 어머니 무덤 앞에 있으니까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같이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p.71P
9월에 미국의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는 인간 병기(Human Weapon) 시리즈의 한국 태권도 편을 한국에서 촬영하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의 한국 로컬 프로듀서(Local Producer)로 선정되었다. 무술을 수련했던 두 미국인 주인공이 세계를 다니면서 각 나라에서 무술을 배운 후에 마지막에 그 나라 무술의 고수와 대련(무술 시합)을 하는 시리즈 물이었다. 내 이력서를 보고 나와 전화 인터뷰 한 후 나를 채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의 프로듀서 루디(Rudy)였다. 나의 영어 실력과 이력 그리고 열정이 나를 선택한 이유라고 했다. 프리 프러덕션 기간 동안 촬영할 내용에 따라 촬영 장소 섭외, 촬영 허가, 한국 스텝 구성, 출연할 사람들을 섭외하고 준비를 했다. 내가 살고 있던 수원의 화성도 촬영지로 섭외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