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테면 사랑은 그렇게 온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날마다 바라보던 그 낯익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흐린 아침,가까운 산이 부드러운 회색 구름에 휩싸이고 그 낯익은 풍경이 어쩐지 살아 있었던 날들보다 더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할 때,그때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렸을 한 타인의 영상이 불쑥 자신의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그 느낌이 하도 홀연해서 머리를 작게 흔들어야 그 영상을 지워버릴 수 있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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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말아라, 너무 크게는 상처받지 말아라. 여자는 마치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걷는 것처럼 사각사각 사라졌다. 여자가 걸어가는 게 아니라 붉은 옷에 수놓인 자디잔 모란꽃모양들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아련한 지분 냄새 같은 것들이 풍겨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뛰어다니다가 잘 넘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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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마루 한 구석, 걸레통에 담긴 작은 비도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큰 비를...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지만 이렇게 어지러운 방안을 쓸기 위해서는 큰 비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일리가 있어보여서 정인은 물그릇을 놓아두고 광으로 나갔다.
'죽어요 엄마가 죽어요'
--- 본문 중에서
' 저 내일 아침거리 준비해 놓을까요? ... 저 시킬 것 있으면 시키세요..... 저녁 시원챦게 드셨으면 수제비 끓여드릴까요? 저 수제비 잘하는 데.... '
' 좀 조용히 앉아 있어. 그게 너한테 바라는 거야'
만일 이런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의 대화일 것이다. 이 세상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비슷비슷하게 눈 두 개와 코 한 개와 입 하나 그리고 모두가 비슷한 크기의 둥그스름한 얼굴을 가졌으면서도 그토록 다른 얼굴이듯이,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게 다른 얼굴을 가졌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그 분위기, 그 미묘함, 거기 앉아 있는 그들의 자세일 것이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지만 언제나 그들 자신들이 제일 모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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