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서 힘을 발휘하는 똑똑함이 진짜 똑똑함이다
--- 이지영 (jylee721@yes24.com)
KBS TV <인간극장>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장길연, 박범준 부부의 이야기를 기억하는지.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 부부가 '잘 나가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떠났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프로다. 그러나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접한 것은 TV 프로그램이 아닌 책 출간을 통해서였다. 즐겨 시청하는 프로가 아닌지라, 이 책을 알아보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이들 부부가 유명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볼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시골 생활의 어려움을 보기 좋게만 묘사한 글은 아닐까, 괜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탓이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유달리 일이 힘에 부치던 날, 책 정리를 하다 우연히 이들 부부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낡은 그네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마주보며 웃고 있는 사진. 길바닥에서 주워온 것마냥 낡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들 부부의 웃음 덕인지, 유쾌한 기운마저 전해지는 의자였다. 그 의자가, 그 의자 위에 앉은 부부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모습이 왜 그리도 마음을 끌던지. 내 손은 어느 순간 책장을 펼쳐 들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유명세를 탄 데에는 '엘리트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무시 못할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산, 들, 바다로 떠난 부부가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엘리트 출신'이라는 배경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특별한 이야기였음을 알겠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그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앞에 서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다른 환경을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해가는 과정이었다.
당시 나는 '일'에 대한 고민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하고 있을 때였다. 단순한 '직장생활'에 대한 고민이라기 보다는, 내가 진정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런 고민은 왜 나이 들어서도 계속 되는지….) 모든 '사물'이 '직업'으로 보이던 그때. 음식점 앞에 진열된 모형 하나를 봐도 '이런 것 만드는 일도 재밌겠는걸' 생각하는 식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꽤 괜찮은 답을 보여주었다.
공부만 잘 하는 사람을 흔히 '헛똑똑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배운 것을 생활에 응용하지 못하는 태도를 '헛공부 했다'라고도 한다. 생활에서 힘을 발휘하는 똑똑함이야말로 진정한 똑똑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부부의 똑똑함은 대학 졸업장이 아닌 일상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낯선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이 벌어 먹고 살 '꺼리'를 찾아내는 점,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즐거운 일꺼리로 만드는 점.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똑똑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이 농촌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한 전초전격으로 대전에 내려갔을 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내게는 참 인상적이었다. 부인은 학교 다닐 때 배운 재주를 활용하여 조각보 만들기 강습을 하고, 남편은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을 발견,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번역 일을 시작한다. 또한 고추, 감자, 상추 등을 재배하며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내고, 필요한 물건은 나뭇가지 등을 주워다가 만든다. 소꿉놀이처럼 보이겠지만, 두 사람이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살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농촌생활에 대한 도시인의 막연한 동경을 자극하는 책이 될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로소 떠날 용기를 주는 책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와 맞는 짝을 만나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게는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책이었다.
농촌 사는 부부가 도시로 온다 해도 마찬가지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꺼리'를 발견하는 일. 지금까지 공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의 진로를 틀어버린다 해도 그 공부를 헛되게 하지 않는 일. 배움을 기반으로 또 다른 배움을 향해 나아가는 그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무모한 도전은 없다. 무용지물로 돌아가는 노력이란 없다. 새로움은, 언제나 지난 날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