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어는 서둘러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1947년 1월, 예정에도 없이 유대인복지기금연맹총회에 참석해 연설을 시작했다. 원고도 없이 연단에 서서 비장한 톤으로 호소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는 우리 조상이 마사다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후의 1인까지 싸우려 합니다. 무기가 있으면 무기를 들 것이고, 무기가 없으면 돌이라도 들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70만 명이 살아나면 유대민족이 살아날 것이고, 70만 명이 죽으면 유대민족은 죽을 것입니다.” 메이어의 비장한 연설에 청중은 가슴을 떨었으며, 더러는 울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족의 운명을 위해 기꺼이 돈을 기부했다. 어떤 사람은 모금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까지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보고받은 유대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구리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에‘간절한 애국심으로 돈을 모금한 한 유대인 여성이 유대인국가 수립을 가능하게 했다.’라고 쓰일 것이다.”
--- 골다 메이어 중에서
그러다 그녀는 1986년, 대통령 하크가 계엄령을 해제하자 그해 4월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귀국하였다. 그녀는 라호레 공항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어느새 독재 타도의 아이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심지어 전날 밤 지방에서 올라와 하룻밤을 묵은 사람도 있었고, 각종 교통수단을 동원해 모여든 지지자들은 흰 벨벳을 두른 그녀가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당시 카라치의 유력한 신문인‘던(Dawn)’지의 한 기자는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카메라로는 그것을 다 담아낼 수 없고, 사전의 어떤 말로도 그 장면을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단순한 말을 쓰려고 한다. 나는 이런 광경을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베나지르 부토, 그녀는 라호레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이 나라를 그녀의 발아래 두었다.” 조국에 도착한 베나지르는 즉각 전국을 순회하며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녀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주로 젊은 남성들과 노동자들이었다. 그녀가 연단에서 연설을 마치고‘여러분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군중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일제히‘네!, 네!, 네! ’하고 화답했다.